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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은 Oct 24. 2020

지금은 나를 거의 잊었을 H에게

나의 사랑 나의 친구 #1

<나의 사랑 나의 친구 >

#지금은 나를 거의 잊었을 H에게


*<나의 사랑 나의 친구> 시리즈는 얼마 전 가장 친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참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게 되어 쓰게 되었다. 나는 가족에게 약간의 결핍을 가지고 있어 예전부터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나는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그런 내가 최근 '사랑받은 티가 난다'는 말을 우연히 들었는데, 그 사랑이 다 어디에서 왔나 살펴보니 결국 친구였다.

내가 잘 받아먹지도 못했던 그 사랑들이 지금의 나에게 아주 많은 원동력이 되었다. 이렇게 혼자서도 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된 건 8할이 친구 덕이다. 고마운 마음을 전할 길이 없어, 내 기억 속의 친구들에 대한 짧은 글을 간헐적으로 남겨보려한다.

별로 재미는 없을테니 큰 기대는 접어두시길.


H는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친구다. 초등학교 1학년 입학식 날 같은 유치원을 나온 H의 얼굴을 발견했을 때의 안도감을 잊을 수 없다. 그 친구가 나에게 다가와 ‘너도 혹시 마법사니?’하고 묻던 기억은 귀여운 일화로 남아있다 (이해해주시길, 그 시절 우리에게는 매직키드 마수리가 유일한 컨텐츠였다). 턱 언저리에 새까만 점이 하나 있는 새하얀 얼굴을 나는 꽤 많이 사랑했던 것 같다. 그 사실은 시간이 많이 흘러 나에게도 같은 자리에 작은 점이 생겼을 때 알게 되긴 했다만. 


H와 친구이던 때를 떠올리면 여름 날 바람이 잘 통하는 옷을 입고 H의 집과 우리집을 오가던 골목길이 선명하다. 우리가 뛸 때마다 시원하게 맞바람이 불었던 것 같다. 참 이렇게 지나고 보면 모든 게 미화되곤 한다. 반질반질한 나무로 지어진 H의 집엔 여름엔 친구와 똑 닮은 언니와 어딘가 우리 할머니와 닮은 할머니가 계셨다. 주말엔 눈을 뜨자마자 대충 씻고 곧장 H의 집으로 향했다. 집에 와서는 몇 걸음 되지 않는 거리에 서로가 있다는 사실에 밤마다 든든한 마음으로 잠들곤 했다. 매일 만나고도 집에 와서 또 통화를 하며 나눴던 이야기가 대체 무엇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초등학교 3학년 땐가 H가 콩닥콩닥한 얼굴로 같은 반의 L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H와 그 모든 감정을 공유하고 싶었던(혹은 이미 하고 있던) 나는 뭣도 모르고 L을 그냥 같이 좋아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같은 날 같이 고백하고 둘 다 대차게 차였었지.


그 맘 때의 우정의 정체는 으레 질투나 동경으로 밝혀지곤 한다. H도 나의 첫 친구이자 나에게 질투라는 감정을 처음 경험하게 한 사람이기도 하다. 내가 부러워했던 건 H의 흰 피부, 찰랑찰랑한 검은 머리, 언니, 스타일리쉬한 엄마, 귀여운 목소리, 키우는 고양이, 깔끔하게 정돈된 방, 느긋한 태도 등 셀 수 없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빼앗고 싶었던 것이 바로 야무진 손이었다. 하얗고 작은 손이 꼬물꼬물 움직여 좋아하는 만화캐릭터를 똑같이 그려내곤 했는데, 그 마법같은 순간을 기쁘게 즐기지 못하고 내내 부러워했다. 부러운 마음에 자꾸만 그 작고 말랑한 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나도 옆에서 같이 그림을 그리곤 했는데, 친구에 비해 내 실력이 한참이나 모자라보여 집에 돌어가면 노트를 찢어버리거나 꼴도 보기 싫어 새 노트로 바꾸기도 했다.


그로부터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났다. 재미있는 사실은 내가 미대를 졸업했고 계속 디자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전히 야무진 사람의 손을 보면 눈을 못 떼는 사람이 되었고, 무언가를 만들고 그려낼 때의 나의 손을 사랑한다. (여담이지만 손이 야무진 사람이 이상형이기도 하다.)


사실 나만 H를 동경했던 것 아니었던 것 같다. H는 내가 책을 빨리, 많이 읽는 걸 부러워했다. 글짓기 대회에 나가서 상을 타오는 것도 신기하고 부러웠다고. 그 친구가 언어와 관련된 일을 하게 되었다는 건 내가 우리의 이야기에서 가장 흥미로워하는 지점이다. 연락을 하지 않은지 한참이 지나 만나자는 말을 꺼내보기도 어렵게 되었지만. 우리, 이렇게 서로의 삶을 써주었어.


나는 아직도 H가 쌓아올린 토대 위에 자라나고 있는 중이다. 어디에선가 네가 잘 지내길 바라. 우리의 모든 추억을 다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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