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다 읽은 나는 왜 가슴이 웅장해진 걸까?
나는 소설(을 포함한 서사 장르)에 긴장감과 개연성, 이 두 가지가 없으면 좀처럼 흥미를 붙이지 못하는 편인데, 내 주의력 수준이 진입 장벽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 최고의 장점은 당연히 손발에 이마까지 땀을 솟게 하는 재미와 긴장감이 되겠다. 태양에 기생한 이상한 생물체 때문에 멸종을 불과 수십 년 앞둔 지구인들이, 늦어도 십수 년 안에 성간 우주 여행 기술을 개발해 11.9광년 거리의 항성계에 보내 태양의 기생충을 처리할 방법을 어떻게든 알아내야 한다는 설정에서부터 위기를 느끼기 시작했는데, 미션 수행 과정에서 이쯤이면 장애물 하나 넘었네 싶은 순간에 적절하게(?) 일어나는 사고 때문에 긴박함과 안타까움을 강제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것만 해도 내 문학 수준에선 별 네 개를 꽉 채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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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이 경이로웠 부분 하나를 더하자면, 적어도 석사과정 이상은 되어야 언급 가능한 과학 설명으로 (조금 과장하면) 소설 분량 절반을 채우는데, 이게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잘 만든 영화조차 긴 과학 해설 때문에 ‘설명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별 반 개 정도는 깎이기 십상인데 말이다. 간혹 이해가 쉽지 않았지만, 인과 정도는 알 수 있도록 풀어 쓴 필력, 나아가 해설이 필요한 시퀀스를 기막히게 배치한 본능이 더해진 결과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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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소설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 외계인 로키와 주인공 그레이스의 이야기였다. 로키와 그레이스가 만나는 과정부터 내 마음의 설렘 수치는 이미 맥스를 채웠는데, 둘의 협업 과정은 정말 환상적이면서도 즐거웠고, 로키와 그레이스가 죽음을 무릅쓰고 서로를 구하기 위해 번갈아 자신의 목숨을 걸었을 때, 우주선 폭발 사고 때 로키가 자신은 생존이 불가능한 공간으로 나가 그레이스를 치료하던 때, 그리고 결정적인 오류 때문에 위험이 빠진 로키와 그의 종족을 위해 그레이스가 우주선의 항로를 틀었을 땐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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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두 대목을 소설의 절정이자 작가가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로 읽었는데, 두 인물이 결정적 위기 상황에서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걸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희생이 가능했을까? 인류와 에리디언(로키 종족의 이름)은 멸종을 막기 위해? 그 또한 당연히 중요했겠지. 다만 독자의 입장에서 썩 공감하기가 어렵다. 소설 후반부에야 밝혀지는 사실이지만, 그레이스는 헤일메리 프로젝트에 우주인으로 참여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헤일메리 프로젝트’가 연료 부족으로 인해 수행원들의 자살로 마무리된다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레이스는 애초에 ‘인류’라는 집단에 대해 그리 큰 연대감이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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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 그레이스가 로키를 위해 죽음을 감수하고 로키를 위해, 망설이지 않고 진로를 돌린 이유는 아마도 우정 때문이었을 거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누구도 가보지 못한 거리에서 만나 함께 임무를 수행하고, 위기 상황에서 목숨을 걸어가며 자신을 지키려 했던 로키를, 자신 또한 지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이 소설이 어떤 경지를 넘어섰다고 생각했다. 도덕 또는 윤리가 세워지는 순간을 엿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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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도덕 또는 윤리는 철학에서 논증 등의 과정을 통해 세워져왔다. 조선 시대의 유학이 그랬고, 칸트의 윤리학이 그래왔으니까. 물론 철학의 방법으로 세워가는 것은 당연히 중요하겠지만,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너무 먼 곳에서 찾으려 들어왔던 건 아닐까? 도덕이나 윤리는 결국 타인을 존중하는 태도일 테고, 그렇다면 일상에서도 충분히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레이스와 로키의 우정이 윤리를 극적으로 보여준 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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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도덕이나 윤리는 친구가 아닌, 보편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둘의 우정이 윤리를 완벽하게 재현해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 장면은 보편 윤리로 나아가기 위한, 충분히 멋진 출발이었던 것 같다. 그 덕분에 둘은 인류와 에리디언을 구해냈으니까. 상상의 한계를 넘어선, 말 그대로 숭고함이었다고 해도 부족함 없는 결말이었다. 이렇게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내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이렇듯 좋은 이야기는 쇼츠의 시대에도, 아니 쇼츠의 시대이기에 더 소중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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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이전 표지 버전이 영화판 표지보다 좋은 사람은 저 뿐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