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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운전 시작합니다

생에 두 번째 서울 운전기

by 채그림


건강검진은 연초가 덜 붐빈다고 한다. 어느 병원이 좋은지 찾아보다가 직장과 제휴한 회사에서 건강검진 병원뿐만 아니라 교통 관련 혜택이 있다는 메뉴를 발견했다. 클릭해 보니 요즘 유명한 카쉐어링 어플 로고가 떴다. 자세히 읽어보니 주중 60퍼센트, 주말 40퍼센트 할인 쿠폰을 준다는 것이다. 얼마 전 과 동기의 친구분이 주말마다 쏘카로 여행 다니신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거다 싶었다.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은 3년의 화려한 운전 경력을 가진 운전 선배님 덕분이다. 걱정스럽고 흔쾌히 운전 연수를 승낙해 주셨고, 그분의 헌신 덕분에 자격 취득 8년 만에 운전을 시작할 수 있었다. 회원가입 메뉴를 클릭하고, 면허증을 찍었더니 가입하는 건 금방이었다. 마침 집에서 1분 거리에 대여할 수 있는 소형 SUV가 있었다. 운명처럼 히뽀(대여한 차종이 하마를 닮았기 때문이다)는 그렇게 나에게 다가왔다.


복잡한 서울을 벗어나 과천에서 연습한 게 첫 번째.
오늘은 용인에서 분당을 거쳐 서울까지 도전해 보았는데 내 바로 앞 차가 앞 앞 차를 박았다. 앞 차가 쿵 소리를 내며 급정거하고, 옆자리에서 “앞차 사고 났어!”라는 말이 들리고, 나는 내 차와 앞 차와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급브레이크를 밟았고, 사고가 안 난 이 영광을 뒤차에게 돌립니다. 멋진 뒤차 차주님... 안전거리 넉넉하게 유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4중 추돌사고까지 나지 않은 것에 감사하고 나니,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문제의 발단은 2차로의 터널이다. 2차선에 있는 내 차 바로 앞에서는 사고 난 차량의 차주들이 차에서 내리고 있었고, 그 바로 뒤에 있는 히뽀의 임시 차주(본인)는 아직 차선 변경에 큰 재주가 없는 왕 왕초보운전자였다. 이도 저도 못하고 좌측 깜빡이만 세월아 네월아 깜빡이는데, 사이드미러로 보니 뒤에서 강심장 택시가 차선 변경을 시도했다. 빵빵거리는 1차선 차들은 또 어찌나 무섭던지. 아무튼 옆에 앉은 지인의 조언 또는 비명을 들으며 어떻게 저떻게 빠져나왔다. '방어 운전 최고! 속도는 중요하지 않다!' 이 두 가지를 마음속으로 읊으며, 아니 말로 읊었던 것 같기도 한데, 사고 없이 집으로 왔다. 반납하고 나니 17분이 연체되어 페널티 10000원에 연장 요금 5000원을 더 나왔다는 슬픈 알림이 도착해 있었지만 여러 깨달음을 얻은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사실 서울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다 보니, 면허증은 약 8년간, 술을 살 때 고1 증명사진이 박혀있는 주민등록증을 내미기 부끄러워 대신 내미는 용도였다. 그런데 운전하는 주변 친구들이 늘어나다 보니 주말마다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싶어졌다. 누군가에게 부탁하거나 의지하지 않고 강원도에 있는 멋진 박물관 스테이에서 하루를 보내고, 한라산 녹음 사이에 있는 에어비엔비도 자신 있게 예약하며, 맑은 날, 잠이 안 오는 밤에 별을 보러 떠날 수 있는 삶이 살고 싶어졌다. 물론 자차를 소유하게 된다면 곧 사라질 로망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갈 수 있다는 선택지가 하나 더 생기는 건 좋은 일이 아닌가!

그래서 단계별 목표는 이렇다.
1. 차를 대여하고 반납하는 것까지 브레이크와 엑셀은 나만 밟는다. (조언은 듣는다.)
2. 운전을 도와주는 지인을 집까지 데려다주고, 오롯이 혼자 집까지 돌아온다.
3. (또다시 도움을 받아) 서울 시내 주행을 마스터한다. (최종 목표는 홍대 골목이다.)
4. 혼자 주말여행을 떠난다.

운전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은 채로 떠나는 여행을 위한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전보다 더 많이 도움 받고 기대야 한다는 게 모순적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더더욱 빨리 발전하고 싶고, 또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다. 언젠가 그분이 믿어만 주신다면, 장거리 운전 대신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차를, 소형 SUV를 탈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여담이지만 개인적으로 차량은 옵션이 최고라는 생각이 있다. 겉모습이 조금 아름답지 않더라도, 안에 들어왔을 때 나만의 파라다이스가 펼쳐지면 좋겠다. 포르*나 람보르기*는 필요하지 않다. 그저 옵션...! 이 말을 들은 피티 선생님께서는 큰일이라며, 일반적인 차에는 컬러풀한 시트, 빵빵한 사운드를 가진 스피커, 아름답게 계기판에 떠오르는 운전자의 이름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마음 아픈 얘기였지만, 현재 옵션은 차치하고, 자차 자체가 다른 은하의 얘기니까 금방 회복했다. 날씨가 좋은 4월에는 작고 소중한 월급과 성과급을 아껴서 히뽀나 한 번이라도 더 만나러 가야겠다. 다음 주에는 수원에 갈 것이다. 모두들 안전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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