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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헌 Oct 17. 2023

10. 솔뫼는 계획이 다 있구나

아무래도 솔뫼가 나에게 딴 마음을 품은 것 같다. 


필시 내가 모를 속셈, 계략, 음모가 있다. 분명하다. 그런 게 아니면 작금의 상황들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근 20년을 보아온 솔뫼가 이럴 줄이야. 역시 사람은 믿을 게 못 돼. 중얼거려봐야 늦었다. 나는 이미 미국이고 유타고 솔트레이크시티고 차도 없고 운전면허증도 없고 20년 산 동네에서도 헤매는 길치고 달러도 없고 우버 택시를 부를 줄도 모른다. 


이번 주엔 브라이튼 레이크스 트레일을 갈 거야. 원래 스키 타는 리조트인데 시즌 아닐 때는 트레일로 개방해. 가는 길에 호수가 세 군데 있어. 호수를 세 개나 연달아 볼 수 있다는 거지. 레이크 메리, 레이크 마사, 레이크 캐서린, 이렇게 세 곳이야. 



열정적으로 브리핑하는 솔뫼를 보며 나는 그저, 여행 일정 공유하는 송은이님 옆에서 짬뽕 매우려나 생각하는 김숙님마냥, 음 호수가 다 여자 이름이네, 하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솔뫼는 내 반응에 개의치 않고(그러기엔 그는 나를 잘 안다) 올트레일 어플을 열어 트레일 사진을 보여주었다. 어때, 예쁘지? 내가 풍경 좋은 데 약한 건 알아가지고. 호수 좋아하잖아? 좋아한다. 역시 솔뫼는 나를 잘 안다. 너무 안다. 


이 세 군데를 꼭 다 가야 하는 건 아니지? 컨디션에 따라 한두 군데만 들러도……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솔뫼가 말했다. 아니, 세 군데 다 갈 거야. 나는 김숙님마냥 부루퉁해졌다. 에엥, 왜 꼭 다 가야 해? 너무 한국인처럼 그러지 마. 솔뫼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아냐. 갈 수 있어. 어렵지 않아. 충분히 할 수 있어. 주먹을 쥐어 보이는 솔뫼는 나를 너무 알고 너무 한국인이었다.      


브라이튼 트레일은 솔뫼의 말대로 호수 세 곳을 돌아볼 수 있는 아름다운 코스였다. 무스를 보았다는 리뷰가 많아 내심 기대했는데 무스는 못 보고 다람쥐 수백 마리를 보았다. 


메리 호수에 도착해 앉았는데 다람쥐들이 사람 소리를 듣고 쪼르르 달려나왔다. 사람을 경계하면서도 겁내진 않는 것 같았다. 과자 봉지 소리를 알아듣는지 내가 맛밤과 견과류를 뜯자 한 마리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견과류를 주려는데 솔뫼가 말렸다. 아차, 싶어 동작을 멈추었다. 그래, 사람 먹을 거에 길들여지면 안 되지. 그런데 기대하고 서 있는 것 같은데. 이건 그냥 견과류니까 괜찮을지도. 아냐, 그래도 안 돼. 아앗, 하지만 너무 귀여운 걸. 그럴수록 야생성을 지켜줘야지. 


혼자 번민하며 맛밤과 견과류를 혼자 야곰야곰 먹었다. 아이들이 과자를 던져주자 다람쥐는 그쪽으로 가버렸고 이어서 다른 다람쥐들도 따라 나와 과자를 주워 먹는 걸 보고 역시 견과류라도 안 주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 다시 다람쥐를 마주쳤을 때 나는 또 번민에 빠져버렸고……. 


맛밤과 견과류, 바나나까지 먹고 그동안 호수도 실컷 보고 두 번째 호수로 이동하는데 어디선가 뿁뿁 소리가 들렸다. 마침 여긴 새가 참 없는 것 같아, 이런 얘기를 하던 중이었어서 새 소리인 줄 알았다. 소리는 나무 꼭대기에서 나고 있었고. 그런데 아무리 봐도 새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럼 뭐지? 다람쥐? 다람쥐가 이런 소리를 낸다고? 대답처럼 솔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우연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새인지 다람쥐인지는 모르겠지만 위쪽에 계신 선생님께서 의도적으로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우릴 쫓아내기 위해. 뭘 보냐는 거지. 꺼지라는 거지. 하지만 선생님, 인간이 나약하다 하나 그런 솔방울로는 안 될 텐데요. 내가 해칠 의사가 없음을 알리기 위해 뿁뿁 소리를 내자 앙칼지게 뿁, 소리가 나고 또 솔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소통은 대개 그러하듯 이루어지지 않았고 우리는 앗, 넵, 그럼 얼른 사라지겠습니다, 하며 그곳을 빠르게 지나쳤다. 


돌아오는 길에서도 그 자리에 사람들이 서 있고 뿁뿁 소리가 나고 솔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을 경계하느라 뿁뿁 소리를 내는 모양인데 뿁뿁 소리가 나니 사람들은 뭔가 하고 쳐다보고 위쪽 선생님은 그런 상황에 스트레스를 받아 더 큰 소리를 내며 솔방울을 떨어뜨리는 과정이 반복되는 듯했다. 그들과 위쪽 선생님이 새끼를 지키느라 예민한가, 그냥 인간이 너무 미운지도, 그럴 만하지, 이런 대화를 주고받고 흩어졌다.


호수는 세 개를 다 돌았다. 솔뫼만 한국인이 아니라 나도 한국인이었기 때문……은 아니고 호수마다 각기 다른 매력이 있었다. 올라갈 때마다 다른 풍경이 펼쳐졌고 제일 위로 올라가면 호수 세 곳을 한꺼번에 내려볼 수 있었다. 물고기의 푸른 눈처럼 고요하고 맑은 호수들을 보고 있자니 내가 다 정갈해지는 기분이었다.    


   

주말 하루 트레킹했으니 남은 하루는 쉬겠지, 했는데 솔뫼는 솔트 플랫에 가자고 했다. 솔트 플랫이 무엇인고 가볍게 물었더니 솔뫼는 솔트레이크시티의 기원에서부터 설명을 시작했다. 굳이 거기서부터?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거기서부터 하는 게 또 솔뫼였고 그의 답과 인터넷에서 찾은 자료를 종합해 옮기면 이러하다.


그러니까 여기는 원래 바다였다. 지구의 사정으로 어느 날 지반이 솟아올랐고 바닷물이 빠진 부분은 땅, 남은 부분은 호수가 되었다. 보너빌Bonneville 호수라고 면적으로는 유타주의 1/3(한국의 절반 면적이라고 보면 된단다), 깊이는 300미터에 이를 만큼 크고 깊은 호수. 


그런데 마지막 빙하기가 끝날 무렵 기온 상승으로 물이 증발하기 시작했고 거기에 녹아있던 암염, 칼륨, 마그네슘 등등의 미네랄들이 남아 응고되어 하얀 사막을 형성하게 되었다. 즉 바다에서 남은 부분이 보너빌 호수, 보너빌 호수 중 말라버린 곳이 솔트 플랫, 지금까지 물이 남아있는 곳이 그레이트솔트 레이크인 것. 그레이트솔트 레이크가 보너빌 호수의 1/10 크기인데도 ‘그레이트’라고 할 만큼 크니 보너빌 호수는 얼마나 거대했을지. 솔트 플랫의 면적 역시 가늠하기 어렵다. 


이렇게 쓰니 오 굉장한데, 생각이 들지만 설명을 들었을 때는 흠 그렇군, 이상의 감흥은 없었다. 그래도 가기로 했다. 나는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 최강 집순이지만 여행과 드라이브를 좋아해서 어디 가자 하면 좋다 하고 따라나선다. 이런 나를 두고 기역은 세상 까탈스러워 보이는데 의외로 싫은 게 없는 사람이라 평하였는데 맞아, 나 진짜 쉬운 사람이라니까, 하고 맞장구를 쳤더니 그건 아니라고 정색을 했다. 뭐, 정색까지 할 일인가 싶지만 틀린 얘긴 아니고.     



솔트 플랫으로 가는 길은 간단했다. 80번 주간Interstate 고속도로를 따라 죽 가면 되었다. 달리는 시야가 시원했는데 여전히 이 공간감에 적응이 안 된다. 오사카에서 1년 반 지낸 것을 빼면 한국에서 죽 살았던 나로서는 이쯤에 산이 있어야 하는데 쩌어기 끝에나 산이 있는 것이다. 도로 옆으로는 그저 황무지, 마른 땅이다. 수풀이 드문드문 있고 공장과 건물도 있지만 대부분은 텅 비어 있다. 한국이었다면 여기에 뭘 짓고 뭘 세우고 뭘 만들어 놓았을 텐데. 이런 것들. 이런 걸 느낄 때마다 내가 완전히 다른 땅에 와 있음을 깨닫는다. 


한 시간 반쯤을 달려 솔트 플랫에 도착했다. 하얀 소금밭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푸른 하늘과 하얀 소금밭의 대비가 명료했다. 눈밭 같기도 하고 잘 닦인 얼음밭 같기도 했다. 햇살이 쨍하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데 눈이라니, 얼음이라니. 빛을 받은 소금이 반짝거렸다. 나중에 말하길 이때 솔뫼는 살짝 실망을 했다고 했다. 엄청 하얗게 눈부신 솔트 플랫을 기대하고 갔는데 한쪽에 물이 고여 있어서 그 눈부심이 덜해서였다는데 나는 아무 생각도 기대도 없이 따라간 거라 별 생각이 없었고(물이 있어도 충분히 아름다웠는데? 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저 아름답기만 했다. 그런 아름다운 소금밭 위를 사람들이 거닐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와, 나도 갈래! 재빨리 양말과 신발을 벗고 솔트 플랫에 발을 내디디는 순간, 아악! 나와 솔뫼는 동시에 비명을 내질렀다. 발이 너무 아팠다. 보기에는 고운 눈 같고 보드라운 얼음 같은데 발밑에 있는 건 눈도 얼음도 아닌 소금이었다. 그냥 소금 아니고 왕소금, 그냥 왕소금도 아니고 진짜진짜 큰 왕소금 덩어리. 


소금이 이렇게 날카로울 줄은 상상도 못했다. 당연하지. 소금을 밟아본 적이 있으니까. 당신, 소금을 밟아본 적 있나요? 그냥 소금 아니라 왕소금, 그냥 왕소금 아니고 진짜진짜 큰 왕소금 덩어리! 그것은 마치 자잘하게 흩뿌려놓은 칼날 같았다. 과장이 아니다. 아니, 조금은 과장일지도. 하지만 칼날을 밟는 것처럼 아팠다는 건 과장이라 할 수 없다. 실제 내가 느낀 게 그러했다. 


미국의 우유니 사막이고 뭐고, 나가고 싶은데 도무지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서 있는 것도 너무 아픈데 너무 아프니까 발을 뗄 수도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면초가의 상태에서 나는…… 웃었다. 울 수 없어 웃은 게 아니다. 그냥 웃겼다. 나는 웬만한 지압 돌길은 평지 걷듯 지나는 사람인데, 뾰족뾰족한 돌을 밟으면 시원해서 부러 뾰족한 돌을 골라 밟는데, 이렇게 발이 아픈 건 처음이고, 그게 맨날 먹는 소금 때문이라는 게, 믿을 수 없고, 나와 솔뫼는 오도 가도 못하고 서로를 붙든 채 서 있고, 서 있으면 서 있을수록 발은 아프다는 것이, 그 모든 게 총체적으로 웃겨서 허리를 꺾어대며 웃었다. 나아가자니 발이 너무 아프고 돌아가자니 아쉬웠다. 여기까지 왔는데, 너무 예쁜데 이대로 보고만 가기에는. 저기 저 한가운데서 사진도 찍고 싶고. 



우리는 의지라는 것을 발휘해 보기로 했다. 둘이 손을 꼭 붙잡고 으앗, 으핫, 으헉, 소리를 지르며 한 발 한 발 나아갔다. 살얼음판 딛듯 한걸음씩 내딛는 우리 곁을 사람들은 성큼성큼 지나갔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저 사람들은 발이 안 아픈가? 발에 깔창이라도 붙였나? 유전적으로 발이 튼튼한가? 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거야? 정말? 고통을 느끼지만 풍경에 취해 걷고 있는 걸까? 인내심을 발휘해서? 하지만 참고 있다기엔 너무 저벅저벅인데, 아무렇지 않아 보이잖아. 끙끙대며 걷고 있는 건 그 넓은 사방에 우리 둘뿐. 심지어 피크닉이라도 즐기려는 듯 천을 깐 이들도 있었다! 조금 외로워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나 외로움을 느끼기엔 발이 너무 아팠다. 


시작 지점으로부터 어느 정도 멀어진 우리는 여기까지, 로 합의하고 사진을 찍었다. 혼자서도 찍고 둘이서도 찍었다. 고통스러웠지만 사진을 찍을 때만은 웃었다. 하얗게 빛나는 소금밭도, 푸르른 하늘도 찍고 이제 됐다, 하고 나가는데 저쪽에서 사진을 찍던 사람들이 떠나는 게 보였다. 그들은 의자에 앉아 다양한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었는데 나는 맨몸으로도 악 소리가 나는 소금밭에 의자까지 지고 온 그들을 마음속으로 경탄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의자를 두고 가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의자는 원래 거기 있었던 것. 


소금밭 한가운데 웬 의자? 같은 의문 대신 나도 저기서, 저기서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평소에 사진 찍는 걸 그닥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왠지 저기서는 사진을 꼭 찍고 싶었다. 정말 저기서 사진을 찍고 싶어? 솔뫼가 물었다. 의자까지 가려면 이미 나온 걸음에 스무 걸음 정도를 더 가야 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솔뫼는 비장하게 돌아섰다. 마음이야 비장했겠지만 행동은 엉금엉금이라 그게 또 너무 웃겼고, 나는 아악 소리를 지르다 웃다가 하면서 의자에 다다랐다.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나무 의자는 가죽이 해지고 낡아있었다. 현대 미술 같아. 불가해하거나 묘한 불일치감을 느낄 때 하는 말을 내뱉으며 사진을 찍고 기념으로 의자 단독 샷도 찍어 주었다. 



촬영을 마친 우리는 다시 손을 꼭 붙잡고 으앗, 으핫, 으헉, 소리를 지르며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계속 걷다 보니 고통에 익숙해지긴커녕 더 아팠다. 거의 다 와서 나는 솔뫼의 손을 뿌리치고 혼자 가라고 했다. 나는 틀렸어, 나를 버리고 가. 하지만 솔뫼는 날 버리지 않고 끌고 나왔고 그새 발과 발목에는 소금이 하얗게 말라붙어 있었다. 


수돗가가 있었는데 고장이었다. 한국이었다면 바로 어플로 생활 불편 신고를 넣었을 텐데. 나와 솔뫼는 가지고 있던 물과 물티슈로 소금기를 닦아내고 한숨 돌리며 하얀 소금밭을 바라보았다. 뭔가 대단한 일을 치르고 난 느낌이었다. 그저 소금밭이 아름답대서 보러 온 것뿐인데. 소금밭은 여전히 하얗게 빛나고 사람들은 즐거워 보였다. 소금은 하얗고 하얀 것은 소금. 소금은 귀하지. 빛과 동급으로 꼽힐 만큼. 무서운 것이기도 했다. 한 번도 깔본 적 없으나 반성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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