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랑 먹을 걸 많이 가져가야 해. 솔뫼는 여러 번 강조했다. 그리고 절키, 절키를 사야 돼. 하도 절키 절키 노래를 부르길래 과자 같은 거냐고 물었더니 육포라고 했다. Jerky, 형용사로는 덜컥거리는, 명사로는 육포. 동사형은 Jerk, 홱 움직인다는 뜻. 힙합 크루 저스트 절크Just Jerk의 이 절크가 그 절크인가 했는데 그건 아니었고(그 절크는 흑인 속어로 춤을 뜻한단다). 오늘도 이렇게 영단어 하나를 익힙니다.
내 영단어 지식이 +1 되는 동안에도 솔뫼는 장보기에 열심이었다. 육포는 막대 모양과 납작한 모양, 맛도 다양하게. 물은 1갤런짜리로 두 통(1갤런이면 약 3.8L), 아니다, 채가 물을 많이 먹으니까 한 통 더 사자. 아, 맞다, 이걸 빼먹으면 안 되지. 이거 두 개 사고…… 솔뫼가 고른 이건, 바게트 조각과 햄, 치즈가 함께 담긴 런치팩.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지극히 단순해 보이는 이 세트가 얼마나 활약하였는지는 나중에 말하기로.
나 이거 사도 돼? 운전하는 동안 입 심심할 때 먹으면 좋아. 솔뫼는 자기 돈 주고 자기 먹을 거 사는데도 내 의견을 꼭 물어본다. 님 마음대로 하시옵소서. 딱 봐도 얄궂은 맛일 것 같은 사탕과 카라멜 봉지를 집어 들고 신이 난 솔뫼가 팝코너, 팝코너도 사야 해! 하면서 과자 코너로 달려가더니 거의 상체 크기만한 과자를 두 봉지나 가지고 왔다. 이거 엄청 맛있어, 채도 좋아할 거야! 그래, 네가 맛있다면 나도 맛있겠지. 그런데 그렇게 큰 걸 두 봉지나. 1+1이란다. 그럼 사야지.
이곳에서 장은 2, 3일에 한 번 꼴로 본다. 가까운 작은 스미스에 제일 많이 가고 중간 스미스, 큰 스미스에는 한 번씩, 트레이더조도 가끔, 홀푸드는 가격에 비해 품질이 애매한 것 같아 한 번 가고 말았다. 솔뫼는 내가 머무는 동안 코스트코를 가보고 싶다고 벼르고 있는데 한국 코스트코의 규모와 정신 사나움에도 질렸던 나는 미국 코스트코는 아직 엄두가 나지 않아 여전히 마음의 준비 중이다.
장보기 품목은 거의 비슷하다. 야채 샐러드와 과일, 피코 드 가요(여전히 매일 먹고 있다. 맛있어!)와 과카몰리, 사워크림, 요거트, 솔뫼의 점심용 냉동식품. 그런데 오늘은 조금 더 특별한 쇼핑을 하는 중이다. 9월 말, 우리나라로 치면 추석 기간인 주말, 국립 공원 투어를 앞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게 솔트레이크시티에 오라고 꾀면서 솔뫼가 가장 열심히 어필한 것이 유타의 국립 공원들이었다. 미국에 국립 공원이 60여 곳이 있는데 그중 무려 5개가 유타주에 있어서 다 가볼 수 있다고. 틈만 나면 사진을 보여주며 열심히 홍보 활동을 펼쳤지만 나는 시큰둥했다. 미국, 국립 공원, 그래, 뭐 다 좋겠지. 근데 난 별로. 아니, 왜! 솔뫼가 절규하며 물었지만 나로서도 딱히 해줄 만한 답이 없었다. 그냥, 딱히, 별로였다.
어느 지점이 딱히, 별로였는지도 딱히,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 굳이 굳이 꼽아보자면, 일단 나는 미국을 비롯한 소위 1세계 국가들에 관심이 없다. 그래도 미국은 한 번 가봐야지, 같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고 유럽 배낭여행에 대한 로망도 없다. 안 궁금하다, 전혀. 역사도 짧고(길어도 다르지 않았을 테고) 그 짧은 역사 중에도 수탈과 착취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그 수탈과 착취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면서 마치 대단한 선진 국가들이라도 되는 마냥 구는 게 별로다.
궁금하지 않고 관심이 없는데 자꾸 세계사에 남을 이런저런 일들(주로 악행, 범죄!)을 저질러 관심 갈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도 성가시다. 좀 가만히 있을 수 없을까. 가만히 있지 말아야 할 일에는 또 너무 가마니들이시고. 아니, 영국은 EU는 왜, 여튼 이런 것들이 전반적으로 좀 다. 대충 이런 감상이다.
솔뫼가 근 3년을 성실하게 꾀었는데도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 먼 데를 어떻게 가. 나 돈도 없어. 내가 가면 번거롭기만 하지. 솔뫼는 성실하게 답했다. 비행기 타고. 오기만 해. 숟가락 하나 얹는 거 일도 아냐. 안 번거로워. 나 너무 심심해. 심심하다고 하기엔 바쁜 나날을 보내고 계신 것 같은데……라고 생각만 하던 내가 어쩌다 나 갈게, 라는 답을 하게 되었는지는…… 역시 ‘생은 예측 불허, 그리하여 의미를 가진다’ 정도로 답하면 딱 좋겠지만(신일숙 작가님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을 안 봤는데도 정말 명언이라고 생각한다!) 이것도 굳이 굳이 꼽아보자면, 환기가 필요했다. 첫 책을 냈고 새로운 작품을 쓰는 중인데 뭔가 새로운 것이 필요했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분위기? 뭐든 새로운 것이.
워낙에 사람이든 사물이든 변화보다는 익숙한 걸 편해하고 좋아하는 사람이라 이런 욕망이 든다는 것부터가 새로웠다. 생각해 보면 최근 몇 년간 새로운 것에 대한 욕망이 봄에 새순 오르듯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다. 사주명리를 공부하는 기역의 말에 따르면 대운이 바뀌어서라는데 대운이든 뭐든 확실히 바뀌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모임에 들어가고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게 된다. 이른바 ‘안 하던 짓 해보는 시기’.
이런 마음이 들 수도 있구나, 이런 걸 해볼 수도 있구나. 남들 눈엔 별 것 아니라도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움직여보는 일은 흥미롭다. 딴 건 몰라도 나 자신은 좀 안다고 생각하는데 그럴 때마다 그건 착각이야, 알려주기라도 하듯 낯선 내가 자라난다. 나로부터 비롯되어 나와 닮았으나 조금은 다른 내가. 보지 않을 때 자라나는 가지처럼 쑤욱쑤욱 자라난다. 이만치 살아도 나는 나를 모른다는 게, 앞으로도 내가 모르는 내가 있을 거라는 게, 그래서 나는 영영 나조차 모를 거라는 게, 그래서 생은 참. 이게 절망스럽기보다는 기대가 된다고 말하게 될 것도 나는 몰랐으니까. 내내 모르고 싶다. 점점 더 몰라도 좋을 것 같으고.
갑자기 솔트레이크시티까지 날아온 건 ‘안 해본 짓 해보기’ 중 가장 큰일이 아닐까 싶다. 비행기 삯도 비싸고 마음에 안 든다고 금세 돌아올 만한 거리도 아니어서 고민고민하다 표를 끊었고(그래서 비쌌다 흑흑)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지내고 있다. 그래서 어떠냐 하면, 좋다. 낯선 곳에서 생활해보는 게 생경한 활력을 주고 낯선 곳을 여행하는 것이 재미있고 국립 공원 투어도 기대가 된다. 무엇보다 투어를 준비하며 들떠하는 솔뫼를 보는 게 즐겁다. 솔뫼는 나에게 하나라도 더 보여주려고 매일 이것저것 찾아본다. 그 마음이 전해져 내 마음도 따뜻해진다.
장바구니 두 개를 가득 채우게 장을 봐오는 길. 나는 거기에 내 마음을 살짝 얹었다. 솔뫼가 보여주는 새로운 세계를 기꺼이 보겠노라고, 선물처럼 주어진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만끽하겠노라고. 풍선처럼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마음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분홍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