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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헌 Oct 19. 2023

12. 집순이 소설가의 여행법

국립 공원 투어 ① 털매머드와 오렌지 딸기 레모네이드

솔뫼가 주말마다 나를 끌고 다닌 것은 사전 훈련이었다. 솔뫼의 계획, 솔뫼가 그린 큰 그림은 바로 이것, 국립 공원 투어였다. 


첫 국립 공원 투어 목적지는 아치스 국립 공원Arches National Park과 캐년랜즈 국립 공원Canyonlands National Park. 두 공원이 가까워 묶어서 많이들 간단다. 여길 가려면 우선 모압Moab, 모압으로 가야 한다. 

모압까지는 멀었다. 최단 경로로 가면 4시간이지만 솔뫼는 동료에게 추천받은 풍광 좋은 경로를 택했다. 5시간. 미국에서는 가까운 거리라고 하지만 한국 사람인 나는 KTX 타고 서울에서 부산 가서 돼지국밥 먹고 광안대교를 찍을 수 있는 시간으로 환산된다. 


반차를 내고 온 솔뫼가 후딱 라면을 끓여 먹고 설거지거리는 내버려둔 채 집을 나섰다. 솔뫼의 백팩, 내 백팩, 트래킹할 때 들 용도로 솔뫼의 물통 가방(하아, 이 물통 가방에 대해서도 할 말이 좀 있는데 일단 참아보는 걸로)과 내 자전거 가방, 선글라스와 물티슈 같이 자주 쓸 용품을 따로 담은 에코백, 간식과 먹거리를 담은 큰 장바구니, 20인치 캐리어 하나를 이고 지고. 그렇다. 우린 집을 싸들고 다니는 사람들인 것이었다. 우리라기보단 내가 그렇다.      



집순이인데 여행을 좋아한다고 하면 으레 물음표가 따라붙는다. 그럼 집순이가 아닌 거 아닌가요? 그럴 때마다 집순이에 대한 고정관념이 얼마나 강한지 여실히 절감한다. 집순이라도 놀러나가고 여행 가는 거 좋아할 수 있거든요? 나만 해도 놀러나갈 때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나가고 여행은 기회가 닿는 대로 간다. 그렇다면 당신은 밖순이……? 놉, 그렇지 않다. 놀러나가는 거 좋아하고 여행 사랑하지만 그와 비교할 수 없게, 훠얼씬 더, 집에 있는 걸 좋아한다. 애초에 집에 있는 것이 기본 상태이고 그것을 가장 사랑하기 때문에 비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여행을 좋아하면 어떻게 되냐면, 집을 옮기듯 짐을 싼다. 저 20인치 캐리어에는 잠옷, 속옷, 세면도구, 화장품, 마사지볼, 책, 독서등이 들어 있다. 여행 가서도 책 읽나요? 물론 읽고요. 5분을 읽어도 가져갑니다. 독서등은 숙소 조도가 낮을 수 있으니 당연히 지참. 


이건 그래도 많이 간소한 거다. 숙소에 비치된 세면용품 향이 안 맞을 때를 대비해 샴푸 트리트먼트 바디젤을 챙기고 드라이어, 요가링도 넣어 다니는 편이라. 책은 두세 권쯤. 조식 먹는 숙소에서 묵으면 조식용 옷 따로, 클럽이나 바에 갈 요량이면 행아웃용 의상과 신발도 하나씩. 


조식용 옷은 특별한 건 아니고, 내가 호텔이나 리조트에서 먹는 조식을 되게 좋아한다. 아침을 꼭 챙겨 먹지도 않고 특급 호텔 아닌 다음에야 숙소에서 먹는 조식 그게 그거지만 그 특유의 분위기가 좋다. 다소 느슨하고 흐물흐물해진, 여유와 흥분, 피로가 가볍게 버무려진 그 분위기. 그런 분위기에 어울리는 느슨하고 흐물흐물한 옷을 골라 입으면 좀 더 여행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여기에, 오가는 동안 먹을 것들이 추가된다. 뭐가 먹고 싶을지 모르니 간식은 최대한 종류별로, 당 떨어질 때를 대비해 초콜릿 카라멜 사탕 젤리 다 넣어주고, 집에 있는 과일도 잘라가고 남은 야채가 있으면 샐러드로 싸간다. 이 정도 챙기면 집을 이고 다니는 달팽이가 여기 있구나 싶다.  


이건 유전적 환경적 영향도 있다고 보는데 우리 엄마가 그렇기 때문이다. 엄마는 아침에 먹을 죽과 간식, 과자, 과일(당연히 한 종류가 아니다), 과도, 접시, 양념, 조미료, 남은 음식 담아올 지퍼백까지 갖고 다니는 보부상 중의 보부상이라 1박 2일 여행을 가도 한 짐이다. 엄마의 여행 짐을 볼 때마다 엄마, 어디 이민 가? 라고 놀렸는데 다 자란 내가 그러고 있다, 하하. 


집순이의 성향은 여행 스타일에도 반영된다. 여러 군데를 많이 보기보다 한 곳에서 가만히 머물며 그곳의 정취를 느끼는 걸 좋아한다. 1박 2일은 너무 짧다. 짧으면 짧은 대로 재미가 있고 매력이 있지만 선택할 수 있다면 1박 2일보다는 2박 3일이 낫고 2박 3일보다는 3박 4일이 낫다. 아주 먼 곳이 아니면 1주일 정도가 딱 좋고 바쁘게 돌아다니는 여행자도 좋지만 거기 사는 사람처럼 느긋하게 지내보는 것도 좋다. 슬리퍼 끌고 나가 동네 식당에서 밥 먹고 시장이나 마트에서 장 보고 해질 무렵 아이스크림 하나 물고 천천히 동네 한 바퀴를 둘러보는 것. 내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여행이다.      



풍광 좋은 경로는 정말이지 풍광이 좋았다. 솔뫼가 한 시간이나 더 드는데도 이 경로로 온 이유는 헌팅턴 캐니언의 헌팅턴 저수지 때문이었다. 


한적한 도로 곁에 자리잡은 저수지는 저수지라기엔 꽤 컸는데 키 큰 나무들이 둘러싸고 있어 아늑해 보였다. 동네 사람들의 물놀이 공간인지 보트를 타고 있는 사람들, 보트를 입구에 부려놓는 가족들이 보였다. 저수지를 따라 걷고 있자니 부부로 보이는 어르신들이 낚싯대를 들고 나타났다. 여기서 낚시도 할 수 있냐 물으니 trout를 잡을 수 있다고 했다. trout가 뭐였더라? 하는 동시에 송어! 라는 답이 떠올랐다. 하아, 이런 걸 기억하고 있다니. 일전에 cod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도 무릎 반사처럼 아, 대구! 라는 말이 튀어나왔었다. 역시 단어는 주입식 교육인가. 


마침 단풍이 곱게 물들고 있어서 두 사람 사진을 찍어줄까 했더니 이미 수백만 장 있어서 괜찮아! 라고 유쾌하게 답했다. 이번에는 그들이 우리에게 물어서 나도 우리도 역시 수백만 장 있어, 하고 답했다. 그치, 우리에겐 수백만 장의 사진들이 있지. 그만큼의 함께한 시간들이 있지. 그래서 솔뫼는 나를 기가 막히게 알고 수고를 무릅쓰고 이런 곳에 데려와 주는 거지. 


아닌 게 아니라 가을이 오고 있었다. 사진을 찍고 ‘가을로 가는 길목a path to autumn’이라는 제목을 붙이면 딱일 것 같았다. 노랗게 빨갛게 조금씩 물들고 있는 잎들, 갈색으로 떨어져내린 잎들, 누군가 나무 밑에 돌탑을 쌓아두었고 그런 걸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나는 돌 하나 얹고 소원을 빌었다.      



저수지를 돌고 나와 차에 타려는데 옆에 안내판이 보였다. 이런 건 또 가서 봐줘야지. 별 거 아니겠지 했는데 세상에, 이곳에 살았던 털매머드에 관한 기록이 적혀 있었다. 1988년 털매머드가 발견되었다는 것이다(그래서 헌팅턴 저수지를 매머드 저수지라고도 부른다고). 여기가 고도 9,000피트, 미터로 따지면 대략 3,000미터쯤 되는데 평지 동물인 털매머드가 여기까지 온 것. 


정확한 이유를 알아낼 수는 없지만 학자들은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서늘한 온도를 찾아 올라온 게 아닐까 추정한다고 했다. 일종의 생태학적 피난지였던 셈. 뉴멕시코주에서 7,200피트 고도에서 매머드가 발견된 기록이 있는데 그보다 높은 9,000피트에서 발견된 건 여기가 유일하단다. 


이곳 특유의 차가운 늪지 진흙이 보존고 역할을 하여 매머드는 생전의 모습을 95% 이상 유지한 채 발견되었는데 털은 물론 위장의 내용물도 남아 있었다고. 위장에서 전나무 잎이 발견된 걸로 보아 먹이가 부족했고 뼈의 상태로 보아 관절염이 심했을 듯하고 사망 당시 나이는 60에서 65세, 이 매머드는 대륙의 다른 매머드와 마스토돈 같은 거대 동물들이 멸종한 후까지도 생존해 있었으며 아마도 북미에 살았던 마지막 매머드일 것……이라는 대목에까지 이르니 쓸쓸해지고 말았다. 마음도 풍경도. 평온하게만 보이던 들판이 완전히 다르게 보였다. 


그러니까 이 매머드는 살기 위해 3,000미터나 올라왔고 극심한 관절통을 앓으면서도 뾰족한 전나무 잎까지 먹어가며 버티고 버티다 생을 마감했다. 북미의 마지막 매머드라는 것은 인간에게나 의미 있는 것이지, 매머드로서는 춥고 외롭고 배고픈 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이런 감상조차 인간에게나 유효한 것이어서 매머드가 겪었을 험난함이나 그로 인해 느꼈을 감정 같은 건 상세히 그려보지 않기로 했다. 굳이 그리지 않아도 이미 몹시 쓸쓸해진 터라.      


모압 숙소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식당은 호텔 직원에게 물어 두 곳을 추천받았다. 메뉴가 비슷해서 고민하다 ‘고구마튀김의 집Home of the Sweet Potato Fries’이라는 부제를 단 The Broken Oar로 결정했다. 구글맵 리뷰에 온통 고구마튀김 얘기길래, 고구마튀김이 맛있다, 내가 먹어본 고구마튀김 중 최고, 넌 고구마튀김을 꼭 시켜야 해 안 그러면 후회할 거야, 난 이 고구마튀김을 평생 그리워할 거야, 고구마튀김 먹으러 다시 올게 등등의, 고구마튀김이 딸려 나오는 새우 프라이와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고구마튀김만큼이나 레모네이드에 대한 호평도 많아서 레모네이드도 한 잔 시켰다. 레모네이드 종류가 여러 가지였는데(할라피뇨 오이 레모네이드도 있었다!) 가게 이름을 딴 메뉴가 있으면 시켜보아야 한다는 솔뫼의 지론에 따라 Oar 레모네이드를 시켰다. Orange-Strawberry라는 설명이 조금 응? 싶었지만 어차피 물 아닌 음료는 잘 안 먹어서 솔뫼 좋은 대로 하라고 했다. 솔뫼가 다 먹겠지. 


그런데 웬걸, 레모네이드는 내가 다 먹었다. 너무 맛있었다. 어떻게 이게 맛있지?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니 솔뫼가 어떻게 안 맛있을 수 있어? 하고 웃었다. 


그러니까 음식에도 상성이라는 게 있잖아. 내 기준으로는(미각이 없냐는 소리를 들어본 사람임) 오렌지와 레몬은 괜찮은데 딸기는 좀 아니란 말이야. 오렌지, 레몬? 닮았잖아, 비슷하잖아. 잘 어울리지. 근데 딸기? 딸기는 좀 아니지. 딸기는 뭐랄까, 맛도 그렇고 식감도 그렇고 다른 부류잖아. 여튼 그런 느낌이라 별로일 거라 생각했는데 오렌지의 상큼함과 레몬의 새콤함, 딸기의 달콤함이 다 느껴지면서 그게 또 부드럽게 섞여, 어우러져, 상큼하고 새콤하고 달콤해, 어떻게 이렇게 맛있을 수 있지 싶게 맛있어! 


레모네이드를 주문할 때 심드렁했던 게 무색하게 나는 이 레모네이드가 얼마나 어떻게 맛있는지 길게 늘어놓으며 커다란 잔으로 한 잔 더 가득 채워 마셨다. 안에 든 오렌지와 딸기청까지 건져내서 냠냠. 


반면 고구마튀김은 홈메이드 맛탕을 먹으며 자란 나에겐 특별하진 않았다. 맛있었지만 극찬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 사람들, 한국에서 맛탕 먹으면 기절하겠네, 정도의 감상을 남길 수 있겠다. 솔뫼는 계피와 설탕이 어우러진 맛이 좋다고 냠냠. 


우리가 열심히 냠냠하는 동안 보름달이 떠올랐다. 아, 추석이지. 소원 빌자. 소원은 빌고 빌어도 끝이 없고 바라는 게 많아 어리석은 인간인가 보다 하고. 눈앞의 레모네이드가 맛있으니 그저 내 마음도 한가위인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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