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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헌 Oct 20. 2023

14. 불굴의 의지로 완강하게!

국립 공원 투어 ③ 아치스 국립 공원 데블스가든 트레일

솔뫼는 트레일을 다니면서 strenuous라는 단어를 배웠다고 했다. 힘이 많이 드는, 격렬한, 불굴의, 완강한, 이런 뜻으로 트레일 리뷰에 이 단어가 있으면 여긴 힘들겠구나 한다고. 나는 이 단어를 더블오 아치Double O Arch를 가면서 체감했다. 


더블오 아치로 가는 길은 데블스가든 트레일Devils Garden Trail. 이름대로 악마적으로 힘들고 격렬한 바람이 불어 불굴의 의지가 없이는 갈 수가 없었다. 그치, 악마의 정원인데 쉽게 갈 수 있음 재미없지 빙고. 


1차 위기를 맞았던 그곳! 내려가는 길이 안 보였다 흑흑.


트레일 초입 커다란 바위를 기어올라가야 하는 지점에서부터 위기를 맞았다. 아까 델리키트 아치에서의 배운 것이 있었다. 올라가는 건 올라가는데 여길 어떻게 내려오지? 마음 같아선 포기하고 싶은데 어린 아이들이 거길 막 뛰어 내려오고(내가 덜덜 떨며 안 무섭냐고 물으니 해맑게들 웃었다. 내게도 뭘 몰라 해맑던 시절이 있었을 텐데 당최 기억나지 않는다) 나이 많은 어르신들도 스틱을 짚고 내려오는 걸 보니 혼자 엄살 부리는 것 같아 민망했다. 한 어르신은 자기처럼 엉덩이로 살살 내려오면 된다고 알려주셨다. 


그래도 망설이고 있자니 딱 그 지점에서, 무슨 계시처럼, 앞에서 말한 나의 구원자 일행을 만났다. You, my savior오, 나의 구원자! 나는 반갑고 고마운 마음에 소리치며 당신 덕분에 죽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다시 한 번 호들갑스러운 감사 인사를 했다. 그는 또 웃으면서 트레일이 조금 힘들긴 해도 할 수 있다며 응원을 해주었고 어쩐지 거기에 부응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하고 응원은 겁보쫄보의 발을 떼게 만든다. 그래, 애들도 하고 파파 어르신들도 하는 거 나라고 못할쏘냐,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해, 몰라, 일단 올라간다. 나는 완강히 마음을 다잡았다.


2차 위기를 겪는 중에 양쪽으로는 이런 절경이 펼쳐졌다!


2차 위기는 까마득한 낭떠러지를 양쪽에 두고 좁은 바위를 지나야 하는 순간이었다. 아래를 보지 말아야 하는데 눈이 자꾸 아래로 갔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코끼리만 생각하게 되는, 그런 거를 내가 하고 있었다. 더 무서운 건 강풍이 불 때였다. 휘익, 거센 돌풍이 휘감듯 불어오며 온몸을 쳐대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날아갈 리는 없겠지만 휘청해서 저 아래로 떨어질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주저앉아버렸다. 후우, 후우, 심호흡을 해보아도 가슴이 쿵쿵 뛰었다. 무섬증이 가라앉지 않았다. 솔뫼가 내 손을 잡아주러 돌아왔다가 깜짝 놀랐다. 내 손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내가 겁보쫄보에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걸 알았지만 이 정도로 무서워하는 건 처음 본 것이다. 당연하지. 이 정도로 바람 휘몰아치는 높은 델 와본 게 처음이니까. 


나는 솔뫼까지 위험에 빠뜨릴까봐 먼저 가라 하고 엉금엉금 기다시피 뒤를 따랐다. 혹시 같은 길로 돌아가야 하니? 좁은 바위길을 다 지나고 내가 묻자 솔뫼가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여길 또 지나야 하구나. 눈앞이 캄캄했지만 지금으로선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얼마간 더 걸어야 했는데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strenuous함에 넋이 나가 힘들지도 않았다. 그리고 더블오 아치에 도착했다. 절묘하게 두 개의 아치가 층층이 두 개의 동그라미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아치 쪽에서 저 멀리 다크 엔젤 스파이어spier(첨탑 모양의 암석 기둥)가 보였다. 나는 더블오 아치에, 다크 엔젤에 빌었다. 부디 내게 용기를 주세요. 더블오 아치의 너른 벽면에 가만히 손을 대자 아득한 데서 응답이 들려오는 듯도 했다. 


그래서일까, 돌아오는 길에 나는 조금은 담대해졌다. 담대, 라고 할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내 자신이 몹시 기특하므로 인심을 쓰기로 한다. 물론 낭떠러지 사이 바위길을 지날 때는 또 돌풍이 불었고 또 주저앉았고, 으아 이번엔 진짜 떨어질 것 같아, 심장이 쿵쿵 뛰고 벌벌 떨긴 했지만 그래도 한 번 지나왔던 길이라고 조금 익숙해졌는지 올 때만큼 겁먹진 않았다(올 때만큼은, 이다). 괜찮아 괜찮아, 다독이며 천천히 나아갔다. 


이제 1차 위기를 겪었던 바위길만 무사히 내려오면 미션 완수. 나는 길치일 뿐 아니라 지형지물도 잘 파악하지 못해서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를 때가 많은데 여기서도 그랬다. 나는 내리막길이 나올 때마다 솔뫼에게 여기가 거기야?라고 물었다. 솔뫼는 아직 아니야, 라고 답했다. 여기가 거기야? 몇 번 물어도 아니라고 했다. 흠 아직 멀었군, 생각하며 어느 지점을 내려오자 솔뫼가 짜잔, 하듯 여기가 거기야! 라고 말했다. 


여기가 거기라고? 나 그냥 내려왔는데? 나는 믿을 수 없어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가 맞았다. 내가 어떻게 내려올지 감감했던 그곳! 트레일이 길었어서 좀 남았나보다 하는 사이 나는 이미 그곳에 다다라 있었고 큰 무리 없이 내려온 것이었다. 


와, 이거 뭐야? 내가 정말 해냈다고? 바위님들이 소원을 들어주셨어! 정말로 그들이 신체도 마음도 심약한 가엾은 아시안 여성에게 가호를 베풀어 주신 것 같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 가호는 내가 스스로에게 베푼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한켠으로 하면서도 감사의 기도를 했고, 거대한 자연이 내 용기의 근육을 조금 자라게 했다는 걸 깨달았다. 


저 멀리 오도카니 서 있는 첨탑이 다크 엔젤님이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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