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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헌 Oct 20. 2023

13. 저들이 신이야, 무겁고 단단히 내려앉은

국립 공원 투어 ② 아치스 국립 공원의 델리키트 아치

아침 7시 전까지 아치스 국립 공원의 게이트를 통과하는 것이 우리의 첫 번째 미션이었다. 


아치스 국립 공원은 시간대별로 입장 예약을 받는데 우리가 예약하려 할 때쯤에는 이미 인원이 다 차버려서 예약을 할 수 없었다. 그럼 아치스에 못 가느냐? 그렇지 않고 아침 7시 이전, 오후 4시 이후에는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다. 일종의 꼼수인가 했는데 홈페이지에도 예약을 못 하면 그때 들어오라고 안내가 되어 있단다. 


일찍 나서는 김에 솔뫼는 일출을 보는 건 어떠냐 했다. 이날 아니면 다음날 캐년랜즈 국립 공원에서 일출을 보아도 멋지다고. 일출……. 일출보다는 일몰파지만 일출을 보는 것도 좋아한다. 하지만 장거리를 달려온데다 종일 걸어야 할 걸 생각하면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았다. 조식 신청을 했는데 못 먹는 것도 아쉬웠고. 이렇게 말하면 꼭 조식 때문인 것 같지만 조식은 포기했고 다른 여러 가지를 다방면으로 고려한 의견이었으므로 상의 끝에 일출은 포기하기로 했다. 욕심내지 않고 찬찬히 다닐 것. 솔뫼나 나나 저체력자라 무리하지 않는 게 최우선이다. 


해가 짧아져 새벽 6시에도 여전히 어두운 거리를 달려 아치스 국립 공원에 도착했다. 게이트 통과도 세이프. 조식을 포기한 보람이 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꼬불꼬불한 길을 오르는 차들이 우리 말고도 여럿이었다.


      

아치스 국립 공원은 이름처럼 아치 모양의 기암이 2,000개 이상 있다고 했다. 바다 밑에 있던 붉은 사암이 솟아오르며 뒤틀리거나 접혔고 그렇게 솟아오른 암석들이 비와 눈, 바람에 깎이고 부서지면서 다양한 모양을 이루게 되었다고. 


2,000개가 넘는 기암들 중에 가장 먼저 간 곳은 아치스 국립 공원하면 첫 번째로 꼽힌다는, 그래서 유타주의 상징으로 차량 번호판에도 등장하는 델리키트 아치Delicate Arch였다. 오르막을 오르는 동안 해가 떴고 사위가 밝아지면서 절로 탄성이 나왔다. 발밑만 보고 걷고 있었는데 주변이 이렇게 아름다웠을 줄이야. 퇴적암이란 이런 것이다, 를 보여주듯 겹겹이 쌓인 지층들이 부드럽게 혹은 가파르게 휘어져 있었고 그 곡선과 색은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 


50분쯤 걸어 델리키트 아치에 도착했을 때에도 태어나 처음 보는 광경과 마주했다. 절경이고 장관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구나, 생각했다. 부러 세워놓았대도 믿기지 않을 거대한 아치 모양의 암석이 장엄하게 솟았고 눈 닿는 곳까지 펼쳐진 암석들은 햇빛을 입어 더욱 신비롭게 빛나고 있었다. 태어나 처음.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을 본다. 이만큼 살았는데 처음인 것이다. 이만큼 살았어도 처음인 것이 있다. 한 발만 떼면 처음은 얼마든지 있다. 나는 얼마나 작고 세상은 얼마나 거대한지. 내 존재의 작음에, 그리하여 아직 오지 않은 무수한 ‘처음’들에, 그것들에 대한 경외와 기대로 가슴이 고요하게 떨렸다. 


천천히 아치 쪽으로 다가가 보았다. 아치 옆에 서보니 크기가 더욱 실감났다. 실제로 델리키트 아치는 높이 14미터, 넓이 9미터로 독립형 아치 중 가장 크다고 했다. 가장 섬세하게 조각된 아치라고 하여 델리키트 아치라는 이름이 붙었고, 이전에는 카우보이의 가죽 바지Cowboy's Chaps라고 불리기도 했단다. 적갈색으로 번쩍이는 아치를 보니 제법 그럴 듯하였다. 



사람들이 아치 아래서 기념사진을 찍느라 줄을 서 있었다. 우리도 그 뒤에 섰다. 각각 따로 찍고 같이 찍는 건 다른 관광객에게 부탁했다. 원래 이렇게 아무한테나 휴대폰을 맡기면 안 된댔는데 여기는 모두가 그러고 있었다. 안 그러면 일행과 단체 사진을 남길 수 없으니까. 사진 품앗이랄까. 모두가 즐거워하며 서로 찍고 찍어주었다. 우리도 다른 관광객들의 사진을 찍어 주었다. 나보다는 솔뫼가 사진을 잘 찍어 솔뫼가 촬영을 맡았다. 나는 그레이트, 오썸! 손가락 들고 손뼉 치며 분위기 띄우는 역할.       


한 무리의 단체 사진을 찍어주고 아치를 느긋하게 감상하기 위해 앉으려는데 누군가 촬영을 부탁했다. 우리와 비슷하게 올라온 이들이었다. 일행이 있는데 왜 서로 안 찍어주고? 그리고 왜 혼자 찍어요? 눈빛에 떠오른 의문을 읽었는지 그는 마뜩찮은 얼굴로 일행은 안 찍고 싶어 한다고, 자기만 찍어 달라 했다. 솔뫼가 상황 파악이 빨랐다. 솔뫼는 넉살 좋게 웃으며 앉아있는 이에게 같이 찍으라고, 여기 너무 좋다고 했다. 낯선 사람이 거듭 권하니 거절하기 민망했는지 앉아있던 이도 일어섰다. 


두 사람은 함께 사진을 찍었고 딱딱하던 이들은 사진 찍을 때만은 활짝 웃었다. 이런저런 포즈도 취하며 촬영을 마치고 휴대폰을 받으러 왔을 때 둘의 분위기는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어쩌다 보니 내려갈 때도 비슷하게 내려갔는데 올라올 때 말없이 따로 떨어져 걸었던 두 사람은 팔짱을 낀 채 꼭 달라붙어 다정하게 웃고 떠들었다. 그 모습을 본 솔뫼는 몹시도 뿌듯해했고 그런 솔뫼가 귀여워 웃음이 났다.      

아치와 사진을 찍고는 아치를 바라보고 앉아 간식을 먹었다. 거대한 아치와 아치를 보고 신나하는 사람들을 보며 맛밤과 솔뫼가 이건 꼭 사야 한다고 했던(그런 게 많긴 했지만) 바게트 조각과 살라미, 치즈가 함께 담긴 런치팩을 먹었다. 런치팩의 비주얼이 지극히 단순했기 때문에, 그냥 바게트 자른 거, 그냥 살라미, 그냥 치즈겠지,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바게트 위에 살라미, 그 위에 치즈 얹어 함께 먹으니 바삭하고 짭쪼롬하면서 적당히 기름지고 치-지cheesy한 것이 너무 맛있는 거다. 이런 풍경 앞에서 뭘 먹은들 맛이 없을까만은 기대 이상이라 감탄하며 먹었다. 자세히 보니 살라미는 그냥 살라미가 아니라 칼라브레제 살라미 매운맛Hot Calabrese Salame, 치즈는 고다 치즈다. 살라미 별로 안 좋아하는데. 고다 치즈가 이렇게 맛있었던가. 솔뫼는 여기에 서양 삼합이라는 별명을 붙였는데 아치 한 번 보고 삼합 한 번 먹고 아치 한 번 먹고 삼합 한 번 보니 극락이 따로 없었다. 


배부르고 신난 김에 좀 더 높은 곳으로 기어올라가 보았다. 올라가니 시야가 더 넓어지며 더 먼 곳까지 보였다. 후아아! 감탄사를 뱉으며 감상하고 내려오려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올라가긴 어찌 올라갔는데 내려오려니 엄두가 안 났던 것이다. 발을 디딜 데가 없었다. 뛰어내리기엔 너무 높고 가팔랐다. 만리타향에서 돌 위에 남아 망부석이 되어야 하나 나의 운명을 고민할 때 이쪽으로 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나는 도와달라고 외쳤고 그들은 웃으며 다가와 나와 솔뫼를 내려주었다. You save my life당신이 나를 살렸어요! 다소 호들갑스러운, 하지만 100% 진심이었던 감사 인사에 그들은 웃으며 별 거 아니라고 말했다.      



아치스 국립 공원에서 가장 좋았던 곳은 꼽을 수 없게 모든 곳이 좋았는데 한 곳만 추천해보라고 하면, 델리키트 아치는 기본이니까 빼고, 더블 아치Double Arch. 차에서 내려 5분 정도 평지를 걸으면 되는 곳이라 휠체어 사용자나 트레킹이 어려운 사람도 무리 없이 즐길 수 있다. 구조가 특이해 가운데 올라가 소리를 내면 울린다는 설명이 적혀 있었다. 아이들이, 어른들도, 바위를 기어오르며 소리를 치고 있었고 나 역시 그러고 싶었지만 이미 체력을 다 소진하여 등산화도 벗어던지고 크록스를 신은 상태였다. 사진 몇 장 찍고 사람 구경하고 아치 잠깐 보고 왔지만 흥미로운 곳이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샌드듄 아치Sand Dune Arch. 온통 암석투성이인 곳에 갑자기 펼쳐지는 붉은 모래밭. 그리로 들어가니 붉은 모래밭을 뭉쳐 쌓아올린 듯한 거대한 암석이 나를 맞아주었다. 시끌벅적했던 델리키트 아치와 달리 사운드 오프 버튼이라도 누른 듯 조용하고 한적했다. 평화로웠다. 리뷰를 보면 델리키트 아치를 비롯한 기묘한 아치들을 두고 신이 만든 것 같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내 감상은 조금 달랐다. 아니, 저들이 신이야. 무겁게, 단단히 내려앉은 신들. 샌드듄 아치는 그런 신들의 휴식처 같았다. 나도 그들 옆에서 잠시 쉬다 걸음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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