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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헌 Oct 21. 2023

16. 생경한 이방인으로 존재하는 감각에 관하여

국립 공원 투어 ⑤ 캐년랜즈 국립 공원의 그랜드 뷰 포인트

숙소에서 조식을 먹고(드디어 먹었고, 역시나 별 거 없었지만 맛있었다!) 체크아웃을 하고 나왔는데 솔뫼의 차 라이트가 깜박이고 있다. 라이트를 켜놓고 내렸을 리는 없고. 누가 차를 건드렸나? 솔트레이크시티도, 여기도 주차장마다 차 도둑을 조심하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문은 잠겨 있었고 라이트가 깜박이는 것 외에는 다를 것이 없었지만 조금 찜찜한 마음으로 출발했다.



국립 공원 투어 두 번째 목적지는 캐년랜즈 국립 공원. 모압 시내를 지나 왼쪽으로 꺾으면 캐년랜즈로 가는 길이다. 좌회전을 하는데 바퀴에 이상이 있다는 표시가 떴다. 솔뫼는 가끔 균형이 안 맞을 때 표시등이 뜰 때가 있다고 말했지만 나는 아까 깜박이고 있던 라이트가 떠오르며 불안해졌다.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어도 솔뫼도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우리는 공사장에 차를 세우고 바퀴를 살폈다. 돌아가며 바퀴를 두드려보고 발로 차보기도 했지만 흠이 나거나 바람이 빠진 것 같진 않았다. 공사장에 일하는 분들이 있으면 봐달라 부탁이라도 하겠는데 일요일이라 아무도 없었다.


나는 캐년랜즈도 캐년랜즈지만 솔트레이크시티까지 돌아가려면 장거리 운전을 해야 하니 좀 지체되더라도 모압 시내로 돌아가 정비소를 찾아보자고 했다. 솔뫼는 회의적이었다. 일요일 아침이라 정비소들이 문을 열었을지도 의문이고 아무리 봐도 바퀴에는 이상이 없다고 했다.


솔뫼가 안전에 더 철저하고 예민한 편이라 솔뫼가 괜찮다니 믿고 가는 걸로. 우리는 다시 한 번 바퀴를 두드려보고 발로 차보기도 하고는 출발했다. 여전히 표시등은 켜져 있었고 우리의 신경은 온통 표시등에 쏠려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태연한 척 달리던 우리는 차들이 세워져 있는 곳을 발견하자마자 멈춰섰다. 마침 산악 자전거 크루들이 있어 그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바퀴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고 하자 리더로 보이는 이가 흔쾌히 와서 봐 주었다. 그 역시 괜찮은 것 같다고 했지만 우리 오늘 솔트레이크시티까지 가야 한다고, 아무래도 걱정이 된다고 하니 그가 오, 그렇구나!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바퀴가 터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지, 하며 자전거 바퀴 압력을 체크하는 기구를 가지고 와 압력을 재주었다.


측정 결과 왼쪽 뒷바퀴가 다른 바퀴들에 비해 압력이 약간 낮았다. 안전한 수치라고 했지만 나는 여전히 걱정이 되었고 그러자 그는 그 기구를 바퀴와 연결하더니 열심히 밟아 바퀴에 바람을 넣어 주었다. 자전거에 쓰는 도구일 텐데, 그걸로 될까 했는데 그걸로 됐다! 그는 그렇더라도 너무 속도를 내진 말고 솔트레이크시티에 돌아가면 제대로 정비를 해보라고 조언해주었다.


이렇게 친절할 수가! You save our lives당신 덕분에 살았어요! 


계속하여 생명의 은인들을 만난다. 이럴 때마다 바닥났던 인류애가 +1씩 상승한다. 이번에는 +10 정도 되었다. 정말 고마워요, 좋은 하루 보내요! 나는 차창 밖으로 큰소리로 인사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들도 흐뭇하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런 거, 너무 좋단 말이지. 반갑게 인사하고 반겨주고 들어주고 도와주는 것. 낯선 외국인이라도. 잠깐 스치고 말 사이라도 서로에게 유쾌하게 웃어주는 것, 친절을 베푸는 것, 고맙다 하면 별 거 아니라고, 도리어 너를 도울 수 있어 내가 기쁘다고 말하는 거, 해서 좋은 기억을 남기는 것.


한국에서도 고마울 일이지만 외국에서 겪는 마음은 더욱 각별하다. 그들이 정말로 좋은 하루, 안전하고 신나는 하루를 보냈으면 했다. 다행히 표시등은 꺼졌고 우리도 이제 정말 좋은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치스 국립 공원이 기암괴석들로 이루어진 아치들의 향연이었다면 캐년랜즈 국립 공원은 기암괴석들로 이루어진 독특한 지형지물의 향연이었다(아치도 지형지물 아니냐고 묻는다면…… 네, 당신이 옳습니다).


아치스 국립 공원도 큰데 캐년랜즈 국립 공원은 훨씬 컸다. 구글에 정확한 면적을 찾아봤더니 아치스 국립 공원은 76,519에이커, 캐년랜즈 국립 공원은 337,570에이커다.


한국인에게 에이커는 갤런, 온스만큼이나 낯서니까 친숙하게 평으로 환산해 보았다. 아치스 국립 공원은 9,300만평, 캐년랜즈 국립 공원은 4억 1,324만평. 네, 4억평이요? 9,000만평도 감이 안 오는데 4억평이라고요? 친숙하긴커녕 더 낯설어져버렸다. 넓다는 건 알았지만 숫자로 확인하니 더 감이 안 오고 내가 캐년랜즈 국립 공원을 다녀왔다고 말해도 되나, 의구심만 든다. 거의 점만 찍고 온 셈이니까.



규모가 커서 캐년랜즈 국립 공원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뉜다. 니들스The Needles, 메이즈The Maze, 아일랜드 인 더 스카이Island in the Sky. 우리가 갈 곳은 아일랜드 인 더 스카이. 콜로라도 리버와 그린 리버 사이 높게 솟아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이름이 마음에 들어, 는 내 감상이고 솔뫼는 세 구역 중 짧은 시간에 방문하기 가장 쉬워서 이곳을 골랐다고 했다. 난이도로 따지면 아일랜드 인 더 스카이, 니들스, 메이즈 순이라고. 시작은 가장 쉬운 곳부터. 바람직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찾아보니 니들스와 메이즈는 꽤나 험난한 모양이다. 특히나 메이즈는 이름대로 미로 같은지 웬만하면 와봐, 넌 할 수 있어, 여길 즐겨봐, 라고 설명하는 공식 사이트에도 접근이 아주 아주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오지 중의 오지라 일반 관광객들은 거의 오지 않는다고. 이렇게까지 오지 말라고 하니 또 호기심이 일었지만…… 만리타향에서 미아가 될 순 없지. 나 여행자 보험도 안 들고 왔다고.


캐년랜즈의 대표격인 메사 아치Mesa Arch에서도 그렇고 그랜드 뷰 포인트 전망대Grand View Point Overlook에서도 뷰트butte라고 하는 특유의 지형을 잔뜩 볼 수 있었다.


뷰트는 꼭대기가 평평한 외딴 산이나 언덕을 말하는데 이것 역시 물이 바위를 녹이면서 만들어지는 것이라 했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속담이 딱 어울리는. 안내판마다 이런 부분을 강조해 두었는데, 근데 그거 수백, 수천만 년 걸리는 거잖아요. 인간은 백 년을 채 못 사는데. 뚫긴 뚫는데 내 생전에 뚫어야 좀 의미가 있다, 그렇지 않나요? 저만 이런 생각하나요? 뭐 이런 생각을 하며 가득 펼쳐진 뷰트들을 보았다. 뷰트마다 생김새도 색도 다 달라서 엎어놓은 머핀처럼 생긴 곳이 있는가 하면 챙 있는 모자 같이 생긴 곳, 무지개떡 같은 곳, 케이크처럼 생긴 곳…… 온갖 모양이 다 있었다.


이것이 뷰트!


원래 계획은 더 많은 곳을 둘러보는 거였는데 내가 그랜드 뷰 포인트에 푹 빠지는 바람에 이곳에서 절반, 업히벌 돔Upheaval Dome에서 절반을 보냈다. 내가 타고나길 계획에 얽매이지 않고 후리후리한 반면 솔뫼는 계획, 일정, 매뉴얼 요런 거에 충실한 타입이라 내가 즉흥적으로 주저앉아버리면 당황스러울 법한데도 언제나 괜찮다고, 마음껏 즐기라고 해준다. 다정한 솔뫼. 솔뫼를 보면 인류애가 플러스되다 못해 하늘을 찌를 만큼 높아지지만 사실 솔뫼는 인간이 아니고 강아지…….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솔뫼로 인하여 살아낸 시간들이 있었다. 솔뫼가 건네준 마음들은 고스란히 남아 내 생의 척추를 이루고 있다. 귀하디 귀한 것을 받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랜드 뷰 포인트는 명칭에 걸맞게 내려다 보이는 경관이 그랜드하게 멋있었다. 멀리로는 라 살 마운틴La Sal Mountain과 아바호 마운틴Abajo Mountain과 니들스 구역이, 가까이로는 모뉴먼트 분지Monument Basin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분지 둘레로는 화이트 림White Rim이라는 하얀 길이 나 있었다. 여기는 험한 비포장 도로라 사륜구동이 아니면 달릴 수 없다고 했다.


솔뫼가 저길 달려보고 싶다고 했어서 트립 어드바이저 사이트에 검색해 보았더니 리뷰어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다. 첫째, 모뉴먼트 밸리와 헷갈리지 말 것. 거기와 달리 여긴 아무나 올 수 없고 아무것도 없다. 둘째, 사륜구동만 가능, 지도와 책자 필수, 자가 구조법self rescue을 익혀와라. 여긴 아무나 올 수 없고 아무것도 없다.


솔뫼가 가려 했던 셰이퍼 트레일. 보기만 해도 아찔!


자가…… 구조……요? 그게 뭔데요? 어떻게 하는 건데요? 그러고 보니 솔뫼는 셰이퍼 트레일Shafer Trail도 가고 싶어 했다. 밤 사이 비가 오지 않았다면 일정에 포함되었을 셰이퍼 트레일은 내려보기만 해도 멀미가 날 것처럼 가파르고 구불구불했다. 찾아보니 여기도 사륜구동을 추천하는데…… 흠, 일단 차부터 바꾸셔야겠는데? 그래도 전 안 갈 거지만. 어쨌거나 솔뫼 화이팅!


그랜드 뷰 포인트 트레일을 걷는 내내 입을 벌린 채 걸었다. 미국에선 한국에서는 별로 쓸 일이 없던 단어들을 떠올리게 된다. 광활한, 거대한, 장대한, 웅장한, 가없는, 거친, 버려진, 압도적인, 무극 무변의 사막, 황무지 같은 것들. 본 적 없는 풍경이 광활하게 펼쳐진다. 끝도 없이. 그래선지 보면서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내가 보고 있는 게 현실이 맞나? 반쯤 꿈꾸는 것 같은 기분.


그랜드 뷰 포인트 트레일을 걸으면서도 그랬다. 하다 못해 자라난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눈에 익은 것이 없다. 여기저기 이국의 언어들이 들려오고. alien alien. 나는 이곳에서 철저히 생경한 이방인으로 존재하고, 바로 이 감각이 내가 구하던 것임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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