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채헌 Oct 13. 2023

9. 아, 강아지 없는 강아지 호수는 반칙이지!

이 얘기를 하고 싶어서였다, 습작 목록을 지리하게 늘어놓은 것은. 


지금 이 문장을 몇 번 다시 썼는지 모른다. 한글은 지리하게, 를 지루하게, 로 고치는 일 따위 그만둘 수 없을까. 문서 프로그램의 대표면 대표답게 문학적 허용 이런 거 좀. 안 그래도 맞춤법 검사하면 말도 안 되는 대체어와 틀린 띄어쓰기 자꾸 추천해줘서 열받는데 말이죠.


여튼 내가 이런 과정을 거쳐 이런 글을 쓰고 있고, 퀴어 여성 연작 소설의 가장 힘들 것으로 예상한 단편의 초고를 털었는데, 이걸 하고 나니 너무너무 지쳐서 충전이 필요했다는 말이다. 보통 충전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특급 충전이어야 했다. 밝은 기운, 여름날 태양처럼 쨍하고 맑은! 한 점의 어둠도 있어선 안 돼. 난 지금 더할 수 없이 어둡고 축축하니까. 


강아지 호수에 가기로 했다. 

밀크릭 캐니언Mill Creek Canyon의 도그 레이크Dog Lake가 이번 목적지.     

 


솔뫼는 강아지 베프 티읕님과 여길 갔었다고 했다. 티읕님은 몸집은 산만한데 3세가 채 되지 않은 데다 해맑은 성격으로 요약하면 천둥벌거숭이 같은 친구라고 했다. 솔뫼를 아주 좋아해서 솔뫼만 보면 겅중겅중 뛰어 달려드는데 자기 몸집이 그렇게 큰 줄 모르고 힘 조절도 못해서 솔뫼가 엉덩방아를 찧기도 했다고.  


나뭇가지를 던져주면 강아지들이 막 물에 뛰어들어서 그걸 물고 와. 티읕도 엄청 신나했어. 다들 얼마나 귀여웠다고. 


솔뫼는 티읕님과 함께 갔을 때 찍은 영상을 보여주며 티읕이 순둥이라 아빠가 던져준 나뭇가지를 기껏 건져와서는 다른 강아지 친구한테 그냥 내줬다고, 그게 얼마나 짠하고 귀여웠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가는 동안에도 그곳에 얼마나 많은 강아지들이 있었고 그들이 얼마나 재미나게 놀았는지 설명해 주었다. 저기, 당신이 제일 신나신 것 같은데요. 나는 솔뫼가 인간의 형체를 한 강아지라는 걸 알고 있다.      


나는 개와 고양이 들을 무서워한다. 워낙 겁보쫄보인 탓인지 개나 고양이한테 물리거나 호되게 당한 적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릴 적부터 그랬다. 


어릴 때 살던 2층 집 옆에는 한 무리의 길고양이 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어두워지면 계단 모퉁이 쓰레기통 위에 모여 앉아 있곤 했다. 그들을 발견하면 나는 현관 턱을 넘지도 못하고 애타게 엄마를 불렀다. 엄마가 고양이들을 쫓아주고서야 계단을 후다닥 올랐다. 


고양이들 입장에선 얼마나 어이없고 번잡스러웠을까. 원래 살던 곳이라 식빵 좀 구우며 쉬고 있는 건데 어느 날 웬 꼬맹이가 나타나더니 자기들만 보면 질겁을 하고 엄마 엄마 불러대며 소란을 떨었으니. 인간들이란. 혀를 차며 물러나주었을 게 분명하다. 몹시 송구하게 생각하고 그들이 인간을 무서워하면 했지, 인간이 그들을 무서워 할 이유와 자격이 없다는 걸 잘 안다. 그런데도 막상 보면 긴장부터 된다. 싫어하는 게 아니다. 절대 아니다. 다가가지 못할 뿐이다. 


그래도 지금은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다. 솔뫼의 공이 컸다. 솔뫼는 동물이라면 다 좋아하는데 특히 강아지 고양이를 사랑한다. 길을 가다 강아지를 마주치면 그냥 지나치질 못하는데 강아지는 강아지를 알아보는지, 강아지들도 솔뫼가 좋다고 달려온다. 서로 반갑다고 꼬리치고 폴짝대는 모습을 보노라면 어찌나 다정한지 절로 둘의 행복을 빌어주게 된다. 내가 겁을 내니까 나와 있을 때는 자제하는 편인데도 그렇다. 


그런 모습을 자꾸 보아서 그런지 두려운 마음이 시나브로 줄어들었다. 요즘은 적당한 거리두기만 되면 웬만큼은 다 괜찮고 솔뫼가 보여주는 동영상 속 강아지 고양이들의 가공할 귀여움에 녹아버리기도, 가끔은 지나는 친구에게 슬쩍 인사를 건네 보기도 한다. 이제는 강아지들이 뛰노는 모습을 보러 가겠다 나서게 되었으니 나, 어제의 나보다 조금 성장한 걸까?      



성장……. 성장은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은데. 이러나저러나 한세상, 못나고 미욱한 채 어영부영 살아도 되지 않을까. 어어, 이렇게도 살아지네, 신기해하면서. 인류 소멸이 코앞이라고도 하고. 엄살을 떨어봐도 생은 나를 내버려두질 않아서,      


나는 강아지 호수에 갔다. 


오르는 길에는 역시나 강아지들이 많았다. 내려오는 강아지들은 한바탕 놀고 난 후라 더욱 밝고 행복한 에너지를 뿜뿜 뿜어냈다. 털이 젖어 후두둑 털어내는 강아지, 진흙 범벅 강아지, 조금은 피곤해 보이는 강아지들을 보면서 나는 기대에 차올랐다. 


이제 강아지 친구들이 신나게 노는 모습을 보는 거야. 막 뛰어다니고 호수에 뛰어들고 헤엄도 치겠지. 사랑스러워라.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날 거야. 내일이 없는 것처럼 뛰노는 모습을 보면 힘든 글을 쓰느라 어둡고 축축해진 마음도 쨍하게 마르겠지. 그럴 거야. 나는 지극히 이기적인 인간답게 그들로 인해 내가 구할 마음의 위안을 떠올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한 시간 반쯤 걸어 드디어 호수에 도착했다.

강아지들이 막 짖고 까부느라 행복한 북새통이어……야 할 호수는, 고요했다. 이렇게 고요해도 되나 싶게 고요했다. 강아지가 없었다. 단 한 마리도. 사람뿐이었다. 말도 안 돼. 강아지 호수인데 강아지가 없어! 강아지 호수라며, 이름도 도그 레이크잖아요! 근데 도그가 없다고, 이건 반칙이지! 강아지들 다 어디 갔어! 



이럴 리가 없는데. 솔뫼가 나보다 더 황망한 얼굴로 호수를 둘러보았다. 어떻게 한 마리도 없지? 우리가 늦게 와서 그런가? 벌써 다 놀고 내려갔나? 두리번거린다고 없던 강아지가 호수에서 뿅 솟아날 리는 없고, 호수는 적막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치 고요할 뿐이었다. 


하아. 헛웃음이 났다. 실망해서가 아니라 재미있어서. 강아지 없는 강아지 호수라니, 이건 마치 앙꼬 없는 찐빵(앙꼬 대신 팥소라는 표현을 쓰는 게 좋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나 앙꼬 대신 팥소라고 하면 느낌이, 그 필이라는 것이 영 안 살기 때문에 별 수 없이 팥소 대신 앙꼬라 쓴다), 김말이 없는 떡볶이, 붕어 없는 붕어빵, 아, 마지막 건 아니고. 


이것도 나름 추억이네. 강아지 없는 강아지 호수. 나는 당황스러워하는 솔뫼를 이끌고 산책이나 하자며 걷기 시작했다. 호숫가 절반은 크고 작은 나무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나무 그늘에 들어서자 맹렬하게 짖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강아지가 있었던 것이다.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 


너무 반가웠는데 강아지 선생님들은 다른 마음이셨던 모양이다. 우리가 멀리서 보일 때부터 짖기 시작하더니 가까워질수록 더 크고 사납게 짖었다. 샌드위치를 먹고 있던 반려인들이 미안해하며 강아지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했지만 강아지들은 낯선 인간들을 경계하고 쫓아내기에 여념이 없었고 우리는 길이 거기 하나뿐이라 그 앞을 지나야 했다. 최대한 몸을 웅크려 공격 의사 같은 전 전혀 없고 선생님들과 대적해 싸울 만한 능력도 없음을 열심히 내보이며 아이고 죄송합니다 선생님들, 아 미국에 사는 분들이니 영어로 해야겠지, 암쏘리, 쏘 쏘리, 를 연발하며 숲길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다시 호숫가로 내려왔을 때 두둥, 막 호수에 도착한 강아지를 발견했다. 그럼 그렇지. 강아지 없는 강아지 호수가 말이 돼? 나와 솔뫼는 눈을 반짝이며(아마도 솔뫼는 내적 꼬리도 붕붕 돌려대면서) 그 강아지를 지켜보았다. 반려인이 나뭇가지를 호수에 던졌다. 이제 강아지가 호수로 풍덩, 할 차례인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강아지는 나뭇가지를 잠시 보다가 호숫가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기만 했다. 나뭇가지엔 별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반려인이 물에 들어가 보라고 하자 강아지는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시늉은 해줄게, 하듯이 정말 시늉만, 발끝만 살짝 적시고는 도로 나왔다.


저 친구는…… 물을 안 좋아하나 봐. 호수로 오는 내내 강아지들 물에서 놀면 얼마나 신날까, 정말 좋겠지, 그러엄, 옷 갈아입고 머리 말릴 걱정 같은 거 안 해도 되고, 이 날씨에 등산하고 물에 들어가 봐, 엄청 시원하지, 집에 안 가고 싶을 거야, 같은 말을 주고받은 게 머쓱할 정도로 그 강아지는 호수에, 물놀이에 흥미가 없었다.

 

하하. 그래, 강아지도 물을 안 좋아할 수 있지. 젖는 거 싫어할 수도 있지. 우리는 강아지 일반화의 오류를 범했음을 인정하고 내려가기로 했다. 그래도 내려오는 길에 강아지들을 여럿 만났고 개중에는 인간 좋아, 무조건 좋아 강아지들과 마주쳐 인사를 나누기도 해서 강아지 게이지를 약간은 채울 수 있었다. 


이건 강아지를 봤다고도, 안 봤다고도 하기 애매해. 강아지를 봤는데 본 것 같진 않은, 그렇다고 안 본 건 아닌데 봤다고 하기도 또 애매한. 애매했어서 기억에 더 남을 것 같아. 강아지 호수를 다녀온 우리의 총평은 이러하였고 다음날 나는 가뿐하게 노트북 앞에 앉을 수 있었다.       



이전 09화 8. 짓는 사람의 습작 연대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