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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헌 Oct 13. 2023

8. 짓는 사람의 습작 연대기

소개에도 썼지만, 나는 8년간의 습작기를 보내고 올해 첫 책  『해녀들: seasters』를 냈다. 그동안 여섯 편의 장편과 네 편의 단편, 한 편의 산문을 썼다. 


장편으로 습작을 시작했고 장편을 주로 써서 장편만 간략히 꼽아보자면, 첫 장편은 『이별도, 맛있다♡』로 이별을 소재로 한 로맨스 소설이었다. 사랑이라 하면 보통 두근두근 설레거나 짜릿하고 달콤한 것을 떠올리지만 기실 사랑으로 생겨나는 고통, 불안, 슬픔이 있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겪지 않아도 되었을 일들을 경험하게도 한다. 이를테면 이별이라든지 이별이라든지 이별이라든지. 사랑하여 갖게 되는 고통, 불안, 슬픔의 감정들, 이별의 경험들에 관해 가볍고 유쾌하게 써보고 싶었다. ‘전격 눈물콧물 로맨쓰!’라는 설명을 달았다. 


네이버 웹소설 챌린지 리그에 연재 형식으로 올렸는데 웹에 올려서 웹소설이라 하지, 딱히 웹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고(글을 써서 올릴 만한 데가 거기밖에 없었다) 웹소설을 잘 알지도 못했다. 열심히 써서 올리면 누군가는 읽어주지 않을까? 무모하기 그지없는, 그야말로 초심자스러운 마음으로 연재를 시작하였고(그런데 지금도 그러고 있군요, 하하)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작품을 마쳤다. 인물도 설정도 줄거리도 서툴기 짝이 없지만(완고 후 다시 읽지 않은/못한 유일한 작품이다) 그럼에도 습작을 하겠다 마음먹고 처음으로 완성한 작품, 단편도 아니고 원고지 2,600매 분량의 장편소설을 오롯이 내 힘으로 써 내렸다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한 작품이다. 


아니, 근데 무슨 소설을 2,600매나 썼지? 이 글을 쓰느라 분량을 확인하고는 진심으로 놀랐다. 안 믿겨서 두 번 세 번 확인했다. 뭐 대단한 이야기라고 2,600매씩이나. 게다가 소설은 처음 쓰면서. 물론 대단한 이야기가 아니어도, 처음 쓰는 소설이라도 2,600매를 쓸 수 있지만, 써도 되지만, 이건 운동 초짜가 3대500 치겠다고 설친 거나 다름없어서. 아이고, 몰라서 용감했고 무지하여 가능했다. 어지간히 용쓰고 낑낑대며 썼던 기억이 나는데 그러면서 근력이 좀 다져졌는지 이후 작업부터는 조금씩 더 수월해진 것 같으다. 



그렇게 해서 쓴 두 번째 작품은 『채운몽』. 세종의 두 번째 며느리이자 문종의 아내 세자빈 봉씨가 주인공이다(그래서 가제가 ‘봉씨전’이었다. 바꾸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실록에 따르면 봉씨는 궁에 든 지 7년 만에 쫓겨난다. 그 원인이 되는 수다한 악행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결정적 대목은 대식. 궁녀 소쌍을 겁간했다는 것이다. 덕분에 봉씨는 조선시대 희대의 악녀로 두고두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데 그에 관한 글을 읽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이거 너무 뻔한 서사 아닌가? 수많은 악녀와 마녀들을 생산해 온 불운과 잔혹의 서사. 기록은 이긴 자들의 것이다. 권력과 힘 가진 자들의 것이다. 살아남은 자들의 것이다. 


봉씨에 관한 기록도 그럴 수 있다 본다면, 어쩌면 봉씨는 그를 쫓아낸 이들의 명예와 정당성을 위해 악녀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것은 아닐까? 역사 속의 수많은 여성들이 그러했듯. 만약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고, 그걸 봉씨의 관점에서 새롭게 상상해 본다면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을까? 


『채운몽』 은 이런 물음에서 시작되었고 역시나 글을 올릴 수 있는 데가 거기밖에 없어서 네이버 웹소설 챌린지 리그에 올렸다. 첫 작품과 크게 다르지 않은 무반응이었지만 댓글을 달고 열심히 읽어주는 소수의 독자들이 있었고, 나만 알아차릴 사소한 것들이라도 첫 작품보다 나아진 점들이 있어 스스로는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 이야기 속 인물들을 만나는 것, 그들을 알아지고 사랑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해 준 첫 번째 작품이라는 점에서 특히나 각별하다. 글을 마치고 그들을 떠나보낼 때의 아쉬움이 지금도 생생하다. 여전히 그들을 떠올리면 가슴 한켠이 아릿하고. 


세 번째는 『미인도』.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 미스터리를 나름대로 파헤쳐 본 작품인데 정말 나름대로 파헤쳐서 엉성함 그 자체다. 작업 일지에 ‘다시 읽어보는데 도저히 읽어줄 수가 없다’는 문장을 써둔 게 눈에 띈다. 웬만하면 내 글을 좋게 보아주는 편인데 어지간히 괴로웠나 보다. 장르도, 소재도 당시의 내가 감당하기엔 벅찼고 지금도 자신이 없어 묵혀두고 있다. 천경자 화백을 존경하고 미인도 미스터리는 여러 모로 안타까운 사건이라 언제고 다시 써볼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내가 노력하고 있으니 노련하게 써낼 수 있는 때가 오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네 번째 작품은 처음으로 출간된 『해녀들: seasters』다. 제주해녀박물관에 갔다가 해녀항일운동에 관해 알게 되었고 그걸 계기로 쓰게 된 작품이다. 불턱에서 쉬고 있는 해녀들을 생생하게 재현한 디오라마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작가의 말에도 썼지만 정말 ‘맞닥뜨렸다’고밖에 할 수 없다. 생의 어떤 결정적 장면과 맞닥뜨린 기분. 그들이 말하고 웃고 움직이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아니, 이미 그들은 말하고 웃고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그저 그들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가만가만, 온 마음을 다하여. 


작품을 완성한 뒤 가능한 모든 공모전에 냈고 틈틈이 투고도 했다. 떨어지고 떨어지고 또 떨어지다 10회 네오픽션 우수상을 받아 올해 출간하게 되었다. 나는 상을 받고 책을 내기 전부터도 스스로 작가였고 또한 작가로 살았지만 대외적으로도 ‘작가’라고 할 수 있는 타이틀을 안겨준 고마운 작품이다. 감사하게도 2023 우수출판콘텐츠 제작 지원작으로도 선정되어 늘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지켜보던 부모님의 근심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그 다음으로 완성한 작품은 『살주殺主』. 조선 후기 주인들을 죽이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자 했던 노비들의 이야기다. 많은 이들에게 그러하지만 조선시대는 나에게도 몹시 흥미로운 시기다. 특히나 살주의 배경이 되는 조선 후기는 잇따른 전란과 재해를 겪으며 지배층의 무능과 탐욕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이를 목도한 민중들 사이에서 다양한 저항과 변혁의 씨앗들이 싹을 틔우기 시작한 시기다. 


살주계는 그 씨앗들 중 하나로 명칭 그대로 주인을 죽이고자 했던 노비들의 결사체다. 이들에 관해 남아있는 기록은 약탈과 살육을 규율로 삼았고 조직이 발각되어 소탕되었다는 정도. 역시나 기록이 담지 않은/못한 행간의 역사를 상상으로 채워 보고자 하였다. 조선을 구성하는 한 축이었던 노와 비들을 뻔하고 하찮은 단역이 아니라 당당한 주연으로서, 신념과 의지를 가진 인간으로서 그려내고 싶었다. 그 노력을 가상히 보아주셨는지 11회 교보문고 스토리대상 우수상을 받았다. 


여섯 번째로 쓴 장편은 『장미맨-숀』이다. 시작이 장면이었다는 점에서 『해녀들: seasters』와 비슷하다. 아주 작고 낡은 골방의 두 소녀. 어두운 방 손바닥만한 햇살 아래에서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두 소녀가 놀고 있다. 작은 고양이도 한 마리. 나는 이제 그들의 이름과 나이를 알고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알지만 앞으로 그들이 어떻게 살아갈지는 도무지 모른다. 알지 못한 채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겠거니 생각하고 싶다. 


그리고 그 사이 또 하나의 장편을 완성했다. 『해녀들: seasters』의 수상 소감에 썼던 소소한 능력을 가진 히어로의 이야기로 가장 신나게 쓴 작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걸 쓸 무렵 나는 굉장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고 글도 한참 쓰지 않았다. 글을 쓸 힘이, 이유가, 여유가 없었고 그 참에 해도 해도 안 되는 거 관둬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근 1년을 글 따위 모르겠다 하고는 놀았다. 놀기만 했다. 


할 만큼 했어.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는 없어. 글 쓰는 법을 다 까먹은 것 같아. 예전엔 어떻게 썼나 몰라. 이젠 쓰라면 못 쓸 것 같아. 그러면 친구들은 같은 말을 해주었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너는 다시 쓰게 될 거야. 지금은 아무 생각 말고 푹 쉬어. 


뭐야, 다들 짰어? 웃고 넘겼는데 그 말들이 주문이었던 것인지, 어느 샌가 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무엇을 바라서도 아니고 무엇도 위하지 않은 채 내가 쓰고 있었다. 쓰는 법을 다 까먹은 건 맞는지, 어떻게 쓰는지 모르면서 쓰고 있었다. 모르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썼다. 쓰지 않고 지난 시간은 없었던 마냥 자연스럽게. 내가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제야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렇게 몰두하여 아무 생각 없이 쓰고 있을 때, 첫 수상 소식을 들었다. 담담했다. 감사하다 답하고 다시 자리에 앉아 글을 썼다. 이렇게 담담하기까지 그 시간들이 필요했던 것임을 깨달았다.


단편들과 미완인 상태의 작품들도 있지만 나의 습작기는 이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게 중요하지, 장르나 형식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아서 작품 목록이 중구난방 각양각색이다. 우당탕탕 예측 불가. 그래서 좋다. 내가 언제 어떤 무슨 이야기를 마주치게 될지, 그래서 어떻게 뻗어나가 어디에 가닿을지 알 수 없으니까. 당장 다음이 있을 수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지만 사뭇 궁금하고 기대가 된다. 


지금은 퀴어 여성들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단편으로 이루어진 연작 소설로 구상하여 작업 중인데 가장 힘들 것으로 예상한 단편의 초고를 털었다. 고쳐야 할 데가 많겠지만 일단은 완성에 의의가 있으니까. 연작 소설과 이 여행 산문을 완성하는 게 남은 올해의 목표라면 목표. 목표라고 해서 반드시 해야 해, 비장해지는 성격은 못 되지만 늘 오늘의 내가 노력하고 있으니까, 과거의 나를 내가 아니까, 미래의 나는 걱정하지 않기로 한다. 


해녀 삼춘들의 신당인 생개남 돈짓당에 책을 올리러 갔을 때 쌍무지개가 떴다. 그렇게 선명하고 또렷한 무지개는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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