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유럽 자동차 여행 2
우리가 여행한 나라는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 세 나라다. 모두 7군데 숙소를 미리 예약해두었다. 독일 도착 첫날과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날 이틀만 공항에서 가까운 호텔을 잡았고, 나머지는 모두 에어비앤비로 아파트나 주택을 빌렸다. 방문 후기를 잘 살펴 평가가 좋은 집들로만 골랐기 때문에 숙소는 대체로 좋았다. 뮌헨에서 지낸 한 집을 제외하고는···.
마인츠에서 여섯 시간여를 달려 저녁답에 뮌헨 숙소에 도착했다. 호스트와 인사를 나누고 집 안내를 받고, 차를 한 잔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호스트는 60대 초반 정도의 남자였고, 영어가 유창했다. 우리에게 궁금한 게 많은지 이것저것 많이 물었고, 뮌헨에서 가볼만한 곳을 태블릿 PC를 보여주며 이곳저곳 친절하게 소개해주었다. 디지털기기 사용이 능숙했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아, 근데 이분 언제 가시는 거지?' 아내와 나는 곤란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점점 피곤해지던 차에 호스트가 전화를 받느라고 2층(내부)으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내려오지 않는 게 아닌가! 통화는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우리는 초조하게 기다렸다. 갑자기 보라색 실내 벽지와 벽을 따라 얼기설기 엮인 덩굴식물과 크리스마스 장식용 작은 등이 기괴해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 집(?)을 떠나지 않았다. 이 상황은 스릴러 영화의 도입부였다.
처음엔 호스트가 예약조건과 달리 우리를 속인 줄 알았다. 예약 사항을 다시 확인해보았다. 보통 숙소 소개 첫머리에 작은 글씨로 '집 전체'라 표기되는데 그곳은 '아파트의 개인실'이라 표기되어 있었다. 그 말인즉슨 호스트와 공간을 공유한다는 뜻이었다. 우리 실수였다. 결국 다른 숙소 찾기를 포기하고 일정대로 그 집에서 4박 5일을 머물렀다. 아침 일찍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와 빨리 저녁을 지어먹고 일찍 잤다.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 때도 불편했고, 거실이나 테라스에서도 편안히 쉴 수가 없었다. 어른이나 아이나 집안에 있는 동안은 거의 방안에 머물렀다.
뮌헨을 떠나 국경을 넘어 스위스 시골 마을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해방감을 맛보았다. 오래된 살레 '집 전체'였다. 와이파이 따위 안 터져도 상관없었다. 아이들도 비로소 활기를 되찾았다.
뮌헨 숙소가 불편했던 탓에 스위스 숙소의 편안함은 더 크게 다가왔다. 스위스에 머무는 동안은 무리해서 관광을 다니지 않았다. 일주일 머무는 동안에 하루는 집에서 편안히 쉬었다. 아이들은 전혀 지루해하지 않았다. 풀밭에서 축구를 하다가 지치면 거실 소파에서 뒹굴며 만화책을 보거나(먼 나라 이웃나라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 편을 가져갔다.) 이러저러한 놀이를 만들어내 놀곤 했다.
아이들은 맥주병 뚜껑만으로 여러 가지 놀이법을 개발했다. 독일은 역시 맥주의 나라인지라 길바닥에 맥주병 뚜껑이 많았다. 특히 분위기 좋은 공원 숲 벤치 주변은 맥주병 뚜껑의 박람회장이었다. 남자아이인 둘째와 막내는 그걸 다 주워 담아 스위스까지 갖고 왔다. 병뚜껑 알까기를 하다가 나중에는 난이도를 높여 나무블록을 쌓고 알까기를 했다. 이윽고는 병뚜껑으로 글자를 만들었다. '퍽' 한글 말고 영어를 떠올리면 욕이다. 초등학생들은 욕에 아주 관심이 많다. 이걸 보고 내가 아무 의미 없는 글자 '역'으로 바꾸었더니 애들은 곧바로 '엿'으로 바꾼다. 좀 있다가 또 '욕'으로 바꿨다. 당해낼 수가 없다! 그러고 놀았다. 나는 다음날 일정을 짜다가 문득 애들 노는 게 재밌어 보이면 끼어들어 같이 놀곤 했다.
한 달 여행 동안 호텔을 제외하고 6곳 집에 머물렀다. 고풍스럽고 멋진 집, 호스트가 몹시 친절하고 깨끗했던 집, 호스트 얼굴조차 못 본 다소 지저분했던 집, 호스트는 진철 했으나 불편했던 집 등 다양했다.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3박 4일 머물렀던 숙소는 깨끗하고 모든 것이 잘 구비된 아파트였다. 호스트 부부도 정말 친절했다. 가까운 마트와 약국의 위치부터 위급할 때 연락 가능한 의사 전화번호까지 지내는 동안 필요한 모든 정보를 파일 하나에 가이드북으로 만들어 놓은 집이었다. 도착 때 반갑게 맞고 모든 안내 사항을 찬찬히 설명해주었다. 막 도착한 여행자를 위한 간식이 거실 테이블과 냉장고에 준비되어 있었다. 시원한 맥주까지! 떠날 때조차 약속한 시간에 맞추어 와서 배웅해주었으며 뉘른베르크 풍경이 그려진 에코백을 우리에게 선물해주었다. 진정한 슈퍼 호스트였다. 아, 물론 우리도 지내는 동안 슈퍼 게스트다운 면모로 지냈다. 청소까지 늘 깨끗하게 마무리하고 나왔다. 한국에서 미리 준비해 간 호스트들을 위한 작은 선물도 고마움의 표시로 전했다. 지갑에 넣어 다닐 수 있는 작은 손거울과 커피믹스였다.
우리가 머물렀던 그 모든 집 가운데 스위스 시골 마을의 살레가 가장 깊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거기선 친절한 호스트를 만나진 못했어도 친절한 이웃이 그 모든 과정을 대신해주었다. 낡았지만 크고 넓은 집, 완벽한 프라이버시, 필요할 땐 언제나 도움을 줄 이웃, 무엇보다 드넓은 자연이 마당으로 펼쳐져 있었다. 낮동안 떠나 있다가도 저녁이면 돌아와 밥을 지어먹고 편안히 쉬며 밤을 맞을 수 있는 곳.
거기가 우리 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