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유럽 자동차 여행 3
내비게이션이 먹통이었다. 대여업체에서 빌려온 톰톰 내비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얼른 찾지 못했다(낡은 기계였다). 프랑크푸르트 공항 도착해서 짐 찾고, 렌터카를 인수하기까지 여러 시간이 걸렸다. 모두 지쳐 있었다. 어떻게든 빨리 공항을 벗어나고 싶었다. 2순위로 생각하고 준비한 스마트폰 내비 사이직(sygic)을 켜자 곧바로 안내를 시작했다.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오자마자 신호등 앞에서 내비는 '좌회전'을 명했다.
“뭐라고? 좌회전?”
낯선 나라에서 처음 맞닥뜨린 도로. 신호등엔 좌회전 표시가 없었고, 그 길에서 좌회전은 말도 안 되는 짓처럼 보였다. 도로 상황을 살피는 사이 신호가 바뀌었고, 나는 허둥지둥하고 있었다.
“여보! 일단 우회전해!”
뒷좌석에서 아내가 명했다. 핸들을 오른쪽으로 급히 꺾었다.
“꺄악!”
아내가 소리를 질렀다. 엉거주춤 서있는 우리 차 오른편으로 뒤차가 우회전을 시도하려던 때 내가 핸들을 돌린 거였다.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다. “공항 주차장을 나서자마자 접촉사고를 내고 말았다.” 이 문장을 쓰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렇게 잔뜩 긴장한 초보운전자의 심정으로 우리 여행은 시작되었다.
나는 길눈이 어두운 사람이다. 운전에 익숙해지기까지 1주일 넘게 걸렸다. 뒷좌석의 아내와 조수석의 둘째가 운전자 못지않게 긴장한 채로 운전을 도왔다. 특히 둘째는 독일 도로의 특징과 내비게이션 작동방식을 빠르게 습득해서 헷갈리는 지점마다 내게 정확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나중에는 우리 차에 기본 장착되어 있던 내비와 스마트폰 내비 길 안내를 비교해서 알려주기까지 했다. 듬직했다. 차에서 다른 식구들 다 잠들어도 둘째는 자지 못하게 말렸다. 초등학교 6학년 아이에게 의지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선하지 않은가!
내비 안내에 따라 이동 -> 시내 도로, 국도, 고속도로 -> 목적지에 주차 -> 걸어서 주변 관광 -> 주차장으로 돌아와 요금 정산 후 다음 목적지로 이동 -> 길에서 멋진 풍경 만나면 쉬었다 가고, 기름 떨어지면 주유소 찾아서 기름 넣고, 고속도로에선 가끔 휴게소 들러 화장실 쓰고, 음식 사 먹고, 하루 일정 마치고 집에 돌아갈 때 마트에 들러 장보고. 어려울 것 없어 보이지만 처음엔 하나하나가 다 도전이었다.
예정에 없이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은 적이 있었다. 독일 뮌헨에서 스위스로 향하는 길에 스마트폰 내비가 거의 8시간 거리를 안내했다. 그런데 자동차에 장착된 내비는 4시간 좀 넘는 거리로 계산하는 게 아닌가. 이거 참. 잠시 고민하다가 자동차 내비를 따랐다. 그랬더니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는 게 아닌가. 오스트리아 고속도로에선 비넷(고속도로 통행 스티커)이 있어야 한다. '어, 비넷을 어디서 사지? 걸리면 벌금이라던데···.' 그러고 있는 사이 스마트폰 내비 '사이직'이 먹통이 되었다. 자동차 내비는 영어 안내, 사이직은 한국어 안내다. 한국어 안내를 받을 수 없게 되자 급 당황 모드가 되었다. 기름도 얼마 없었다. 내비로 가까운 주유소를 찾는 게 급선무였다. 차를 갓길에 세우고 상황을 파악해보니 '사이직'은 데이터를 사용하지 않는 GPS 기반 내비게이션이다. 나는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 세 나라 여행한다고 세 나라 지도만 다운로드했으니 내비가 오스트리아 경유하는 안내를 못하고 먹통이 되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오스트리아 지도를 다운로드하고, 가까스로 주유소를 찾아가 기름도 넣고 비넷도 샀다.
자동차로 옮겨 다니는 여행에 이런 일, 저런 일이 많았다. 기억에 남는 몇 장면.
- 나라 별로 표지판과 속도 기준, 운전 습관이 달라져서 항상 적응기간이 필요했다.
- 내비게이션 경로에 국경이나, 톨게이트, 페리 노선이 포함되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목적지를 설정하면 미리 알려주고 오케이를 묻는 내비게이션도 있다.
- 스위스 취리히에선 도로 바닥의 차선 표시가 너무 복잡해 헷갈렸다. 역주행할 뻔한 위기가 있었다.
- 독일 고속도로는 일부 위험 구간을 제외하고 최고 속도 상한선이 없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다가와 내 꽁무니에 찰싹 붙는 차들이 많아서 힘들었다. 재빨리 오른쪽으로 피해 줘야 한다.
- 네덜란드에서 실수로 매너에 어긋난 운전을 한 적 있다. 연이어 두 대의 차가 내 옆에 와서 창문을 내리고 네덜란드 말로 뭐라뭐라 화를 내고 갔다. 나는 영어로 쏘리쏘리 했다. 예의 없는 행동을 그냥 못 넘기는 사람들인 듯.
- 기계로 직접 결제하는 무인 주유소는 이용하지 말 것. 결제 방식이 헷갈려 잘 못하면 돈 떼인다는 얘기를 들었으나, 여행 막바지 자신감에 네덜란드 무인 주유소를 두 번 이용했는데 금액이 몇 배씩 초과 결제되었다. 한국에 와서야 알았다.
- 스위스는 길이 꼬불꼬불해서 이동 시간이 오래 걸렸다. 멀리 가기가 힘들다.
처음 주유하던 날. 저녁에 마인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미리 보아둔 주유소에 들렀다. 책에서, 인터넷에서 본 대로(!) 주유구에 주유기를 밀어 넣고 손잡이를 눌렀으나 주유기 계기판의 숫자는 변화가 없었다. '이거 뭐지?' 주유기 계기판과 주유구를 번갈아 보다가, 주유구에 귀를 대고 기름 들어가는 소리가 들리나 들어보다가···. 결국 가게 안으로 들어가 카운터 직원에게 도움을 청했다. 직원은 빙긋 웃으며 작업복 조끼를 걸치고 장갑을 끼고 나왔다. 주유기 계기판 숫자를 보더니(0이 아니었다) 0으로 리셋했다. 주유기 뚜껑 안쪽에 연료타입을 확인하고 주유구에 주유기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주유를 시작했다. 계기판 숫자가 비로소 움직였다. 직원은 주유하는 내내 설명과 함께 천천히 그 과정을 시연해 주었다. 서두르지 않고 내가 잘 이해하고 습득하도록 해주었다. 나는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연발했다. 그는 20대 정도의 여성이었다. '독일 젊은이들은 사람을 이렇게 대하는구나' 그렇게 또 느꼈다. 네로탈 공원에서 만났던 앳된 청년도 그랬다. 내 말을 경청하고, 내 상황을 살펴 찬찬히 내 문제를 풀어주었다. 손님을 대하는 과장된 친절과 어투는 없었다. '상황에 집중하고 진지하게 임하는 것'이 그들의 몸에 밴 태도처럼 보였다.
그날이 우리가 머물렀던 첫 도시인 마인츠를 떠나기 전날이었나 보다. 주유를 하고 동네 어귀 슈퍼마켓 REWE에서 저녁거리와 내일 차에서 먹을 간식을 사서 집으로 올라갔다. 여행 초반에 만난 두 젊은이 덕분에 마인츠가 오래도록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