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유럽 자동차 여행 4
여행 초기 우리 아이들의 반응을 요약하면 이랬다.
“미술관·박물관 싫고요, 성(castle)도 싫어요”
어른과 아이가 느끼는 여행의 온도차는 꽤 컸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성이라는 노이슈반슈타인 성(Schloss Neuschwanstein, 디즈니랜드 신데렐라 성의 모티브가 된 성)에 갔을 때 극명하게 느꼈다. 숲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 가까이서 성 외관을 보고, 성의 그림 같은 풍경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다는 마리엔 다리까지 가는 게 필수코스였다(도보 40분).
마지막 종착지라 할 마리엔 다리는 몹시 붐볐다. 한참 줄을 섰다가 겨우 비집고 들어가 잠깐 풍경을 보고 서둘러 기념촬영을 하고 빠져나와야 하는 분위기였다. 이 모든 과정이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를 보러 가는 행렬과 흡사했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 표정이 굳어지더니 카메라를 들이대면 피하거나 일부러 잔뜩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우리 아이들만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마리엔 다리 입구에서 잔뜩 화가 나 울기 직전인 사춘기 즈음의 여자아이를 보았다. '아빠는 진짜···. 사진 몇 장 찍자고 이딴 걸 이렇게 줄 서서 기다려야 하다니!' 그런 표정이었다. 사람들로 넘쳐나는 관광지에서 느끼는 특유의 왁짜한 분위기를 어른들은 여행의 중요한 과정으로 받아들이지만, 아이들(특히 사춘기 무렵의)은 그렇지 않았다.
여행 초반 시행착오를 겪으며 우리 가족은 몇 가지 지침을 만들었다.
- 되도록 자연 위주의 관광지를 찾자.
- 점심은 간단한 도시락으로 준비해서 배고플 때 언제든 먹을 수 있게 하자.
(아이들은 배가 고프면 즉각 짜증으로 신호를 표출한다.)
- 간식을 항상 준비하자. (잠시 쉴 때 에너지를 보충하고 기분 전환하기 좋다.)
- 하루에 많은 곳을 들르지 말자. (장기 여행이니 아프지 않도록 체력 관리)
- 아이들도 좋아할 만한 미술관·박물관을 찾자.
- 필요하다면 집에서 하루 내내 편안히 쉬는 것도 고려하자.
이 원칙을 세우고 여행을 하니 분위기가 한결 나아졌다. 어른도 아이도 각자 요령을 익히고 적응했다.
뮌헨에 머물 때 자동차로 두 시간여를 달려 독일 최고봉 추크슈피체 산(Zugspitze, 해발 2,962m)에 갔을 때가 기억에 남는다. 아이브제(Eibsee) 호수 옆에서 엄청나게 큰 케이블카를 타고 곧바로 정상까지 올라갔다. 케이블카가 올라가며 풍경이 바뀔 때마다 세계 각지에서 온 여행자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올라가는 동안은 꽤 스릴 있고 흥미진진했으나, 정상에서 본 풍경은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다. 안전 때문에 설치한 울타리가 시야를 좀 가리기도 했고, 건물과 각종 시설물들이 복잡한 탓에 탁 트인 파노라마 풍경을 보기 힘들었다.
산에서 내려와 아이브제 호수에 가서 점심 도시락을 먹었다. 크림치즈를 바르고 햄과 토마토를 얹은 바게트 샌드위치였다. (여행 내내 질리지 않고 먹은 점심이다.) 점심을 먹고 호숫가에 앉아 느긋하게 쉬었다. 붐비지 않고 호젓해서 좋았다. 우리와 같은 가족 단위 여행자들이 군데군데 있었다. 수영을 하거나 서서 노 저어 가는 패들보드를 타는 사람도 있었다.
아이들과 바지를 걷고 물속에 들어가 물수제비를 떴다. 나는 몇 번 하다가 금방 지쳐 물밖에 나와 앉았는데 둘째와 막내는 한참 동안 열정적으로 물수제비를 떴다. 바닥에서 좋은 돌을 골라 저 먼 곳을 향해 휘리릭 던지면 “타다다다다다닥” 수면을 튀기며 날아간다. 둘째는 물수제비 대회가 있다면 선수급이라 많게는 10번 정도까지 물 위를 튀긴다. 주변 아이들이 덩달아 물수제비 놀이에 뛰어들어 재밌는 풍경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렇게 물에서 놀고, 호수를 따라 이어진 숲 길을 따라 걸으며 오후를 보냈다. 어른이나 아이나 케이블카를 타고 산 정상에 갔다 온 것보다 호수에서 보낸 시간이 더 좋았다. 여행 막바지까지 좋은 자연환경을 찾으려고 애썼지만 가이드 북과 인터넷 검색만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실패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여행 중반으로 접어들면서부터는 그날 일정이 만족스럽지 않아도 아이나 어른이나 남을 탓하지 않고 관대하게 수용할 줄 알았다. 여행에 긴장이 풀리고 차츰 편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