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숲

#011 #무라카미_하루키

by 이채준

작성 : 2021년 1월 9일


계기


<상실의 시대>라는 책이 베스트셀러였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상실의 시대>의 표지는 꽤나 인상적이었다. 심장 쪽에 총은 맞은 듯한 사람의 형체가 그려져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표지를 몇 주 전 통신소를 정리하면서 다시 봤다. 뭔가 강하게 끌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고전이 아닌 소설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서 그 끌림을 무시해버렸다. 그러다 유튜브에서 한 영상을 봤다. Jack Edwards라는 사람이 Harry Styles가 추천한 책을 리뷰하는 영상이었다. 그 영상에서 Jack Edwards는 <노르웨이의 숲>을 강력하게 추천했다. 마침 부대 도서관에도 <노르웨이의 숲>이 떡하니 있길래 이 책을 보기 시작했다.


느낀 점


되게 재미있게 읽었다. 몰입해서 읽었다. 500쪽이나 되는 책을 3일 만에 읽은 건 처음이다. 그 정도로 푹 빠져서 읽었다. 주인공 와타나베와 물아일체가 됐었다. 책의 내용은 내게 실제로 일어났던 일 같았다. 와타나베가 느꼈던 감정들은 내가 그와 비슷한 나이에 실제로 겪었던 감정들과 비슷했다. 그래서 더 공감이 되었던 것 같다.


솔직히 느낀 점을 정리하기 정말 어려웠다. 이 책에는 정말 많은 내용과 디테일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또 어떻게 해석하냐에 따라 정말 다르게 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느낀 점을 한창 적다가 '이게 과연 이 책의 주된 내용일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때마다 '이게 아닌데' 하면서 느낀 점을 지우고 쓰고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유튜브에서 '문학 줍줍'님의 감상평을 듣고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것 같다.


먼저 와타나베에 대해 말해보겠다. 그는 알 건 다 아는 똑똑한 사람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에게 편안함을 느낀다. 그렇지만 그는 그 어느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한다. 그는 관계에 있어서 적극적이지 않다. 자신의 진심을 말하지 않고 끌려 다닌다. 기즈키에게도, 나오코에게도, 미도리에게도 그는 끌려 다닌다. 끌려 다니는 게 편하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이런 관계는 깊게 발전될 수가 없고 위험하다. 칼날을 손에 쥐며 상대방에게 칼을 건네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다른 사람의 평가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나르시시스트다. 여자들과도 성관계를 맺지만 그에게는 성적 쾌락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 삶의 태도로 인해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하나 둘 잃게 된다.


와타나베에게 특별한 사람인 나가사와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다. 나가사와는 전형적인 영 앤 리치, 톨 앤 핸섬이다. 그는 문학을 좋아하며 입담도 좋다. 앞으로 삶에 대한 명확한 계획도 있는 사람이다. 한국으로 치면 외무고시까지 패스한 엄청난 인재다. 그렇지만 그는 멋진 여자 친구를 뻔히 두고도 와타나베와 함께 '채우지 못할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여자들을 헌팅하러 다닌다. 좋은 말로 하면 능력 있는 남자고 나쁜 말로 하면 소시오패스다. 도덕적으로 나사가 하나 빠지긴 했지만 나는 그가 성공적인 삶의 대명사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그는 와타나베에게 '자신을 동정하는 건 저속한 인간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하며 자신을 동정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나르시시스트가 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미성숙한 모습이며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 '어른'이 되라고 말한다.


이 책은 와타나베의 성장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기즈키의 죽음과 나오코의 병이라는 아픔에 방황하고 힘들어한다. 외로움을 느끼며 이 여자 저 여자와 무분별하게 잠자리를 갖는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의 기억으로 가즈키를 잊어가면서, 나오코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면서 그 아픔을 딛고 일어선다. 하지만 나오코의 병세가 악화됐다는 편지로 그는 다시 넘어진다. 수염도 깎지 않고 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않으며 술로 밤을 보낸다. 그렇게 피폐한 나날을 보내다 문득 나가사와의 충고가 떠오른다. 그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자기 연민의 수렁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그때 그는 살겠다고 결심을 한다. 어린애처럼 굴지 않고 삶에 책임을 지며 살아가겠다고 멋지게 다짐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오코가 죽자 그는 또다시 넘어진다. 그는 슬픔에 면역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람은 슬픔을 이겨내며 성숙하고 성장한다. 하지만 슬픔은 익숙해질 기미도 보이지 않으며 그 순간마다 사람을 아프게 한다. 그 사람의 세상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다. 저자, 하루키는 이런 슬픔의 본질을 깨닫고 그 순간에 필요한 위로와 격려를 젊은이들에게 보내주고 있는 것 같다.


어이, 기즈키, 나는 생각했다. 너하고는 달리 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고, 그것도 제대로 살기로 했거든. 너도 많이 괴로웠을 테지만 나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야. 정말이야. 이게 다 네가 나오코를 남겨두고 죽었기 때문이야. 그렇지만 나는 그녀를 버리지 않아. 왜냐하면 난 그녀가 좋고 그녀보다는 내가 더 강하니까. 나는 지금보다 더 강해질 거야. 그리고 성숙할 거야. 어른이 되는 거지. 그래야만 하니까. 지금까지 나는 가능하다면 열일곱, 열여덟에 머물고 싶었어.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난 이제 십 대 소년이 아니야. 난 책임이란 것을 느껴. 봐, 기즈키, 난 이제 너랑 같이 지냈던 그때의 내가 아냐. 난 이제 스무 살이야. 그러고 나는 살아가기 위해서 대가를 제대로 치러야만 해.
p.483


그것은 분명한 진실이었다. 우리는 살면서 죽음을 키워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배워야 할 진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나오코의 죽음이 나에게 그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어떤 진리로도 사랑하는 것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 어떤 진리도, 어떤 성실함도, 어떤 강인함도, 어떤 상냥함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슬픔을 슬퍼한 다음 거기에 뭔가를 배우는 것뿐이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또다시 다가올 예기치 못한 슬픔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p.529


이 책엔 정말 다양한 인물들이 나와 있다. 굳이 등장시키지 않아도 물 흐르듯 잘 흘러갈 시나리오에 그들을 등장시킨 것은 뭔가 의도를 담아내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와타나베가 미도리의 아버지를 만나러 갔을 때 이야기한 '연극사 2'에서 배우는 에우리피데스를 이에 대한 근거로 들고 싶다. 에우리피데스의 연극에는 '이런저런 사람이 나오는데 그 모두에게 각각 사정과 이유가 있고, 모두가 나름대로 정의와 행복을 추구'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정의와 행복이 실현되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들은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카오스'에 빠진다. 이처럼 하루키는 '카오스'를 만들어 내기 위해 수많은 인물들을 등장시킨 것 같다. 그들만의 사정과 이유가 있는 와타나베, 기즈키, 나오코, 미도리, 레이코, 나가사와, 하쓰미 등이 등장한다. 그들은 서로와의 관계 속에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카오스'에 빠진다. 하루키는 그들의 다양한 사정과 이유에서 다양한 디테일들을 새겨 놓았다. 나는 그것을 느꼈다. 하지만 나의 능력 부족으로 다 이해하지는 못 했다. 그래서 이 책의 디테일 하나하나를 집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고 결론을 내렸다. 몇 년 뒤 디테일을 잡을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난 뒤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분명 또 다르게 와 닿을 것 같다. 디테일들을 찾고 이해하는 것도 나름 재미있을 것 같다.


소설이 10장에서 끝났으면 참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11장은 충격 그 자체였다. 와나타베가 역경을 딛고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던 것 같았다. 오히려 11장으로 슬픔이 사람을 얼마나 이상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 한 것일 수도 있겠다. 11장에서 와타나베가 보여준 모습은 혼돈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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