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의 고독
#012 #가브리엘_가르시아_마르케스
작성 : 2021년 1월 24일
계기
밀란 쿤데라가 극찬을 한 책이라고 해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책꽂이에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꽂아놓고 어떻게 소설의 죽음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밀란 쿤데라가 말했다고 한다. 노벨 문학상을 탄 책이라고도 하니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명작일 것이라고 생각해 읽기 시작했다. 요즘 고독이라는 것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는 나에게 <백년의 고독>이라는 제목은 나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느낀 점
너무 어렵다. 너무너무 어렵다. 나만 이렇게 어려워하나 싶어서 책을 미처 다 읽기 전에 다른 사람들의 리뷰를 먼저 보았다. 모두 하나 같이 어렵다고 했다. 어렵게 읽히는 것이 오히려 의도라고 한다. 좀 화가 났다. 읽는 것 자체도 너무 힘들었고 책 한 권 읽는데 2주라는 긴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 중간에 다른 책으로 갈아탈 수 있었고 갈아타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한계를 시험해보기 위해 오기로 읽어나갔다. 그렇게 전투적으로 완독을 했다. 다 읽고 나니 책이 어렵다고 화를 냈던 것이 무색해졌다. 책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 가문의 6세대에 걸친 대서사시를 보며 나는 이 책에서 고독을 발견했다. 이 책의 중심이 되는 부엔디아 가문 사람들은 하나 같이 사랑에 무능하다. 남녀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진창으로 성관계를 갖지만 노르웨이의 숲에 등장하는 와타나베처럼 오히려 고독해진다. 모두가 사랑은 간절히 원하고 좇지만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 고립된다. 고립된 부엔디아 사람들은 반복적인 노동을 지속하며 고독을 음미하다 죽는다. 소설의 끝에 가서는 진정한 사랑이 이루어지긴 하지만 그 사랑은 결국 근친상간으로 밝혀진다. 근친상간의 결실로 나온 아이는 돼지꼬리를 갖고 태어난다. 그의 아빠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그 아이는 식인 개미들에게 죽임을 당한다. 개미 밥이 되어버린 아이를 끝으로 부엔디아 가문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진정한 사랑조차 고독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근친상간으로 끝이 나버린 부엔디아 가문은 그들이 손수 일으켜 세운 마꼰도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등장인물 중 페르난다를 보며 깨달은 바가 하나 있다. 고상한 척, 잘난 척의 결말은 파국이라는 것이다. 중요하지도 않은 자신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꾸며낸 거짓말은 결국 비극으로 끝난다. 페르난다는 여왕 교육을 받은 엘리트 중에 엘리트이다. 하지만 불쌍하게도 그녀는 고상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부엔디아 가문으로 시집을 오게 된다. 부엔디아 가문에 적응해 사는 것이 현명한 것이겠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는다.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며 온갖 고상한 척은 다 한다. 나는 이 여자가 부엔디아 가문의 쇠락에 막타를 쳤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자식들을 그들의 의지가 아닌 그녀의 의지로 유학 보낸다. 호세 아르까디오에게는 교황 교육을 시켰고 메메에게는 클라비코드 교육을 시킨다. 그들은 하나 같이 유학 도중에 마꼰도로 되돌아와 한량처럼 산다. 호세 아르까디오는 되돌아와 동성애에 빠져 산다. 그는 결국 부엔디아 가문의 마지막 자산을 도둑 맞고 죽임을 당한다. 술과 유흥을 좋아하던 메메는 바나나 농장에서 일하는 기계공의 아이를 갖는다. 페르난다는 이를 수치로 여겨 기계공을 죽이고 그녀를 수녀원으로 보낸다. 그렇게 수녀원에서 태어난 메메의 아들 아우렐리아노는 마꼰도로 다시 보내지게 된다. 페르난다는 자신의 체면을 위해 아우렐리아노의 출신과 부모를 숨긴다. 아우렐리아노의 출신지를 강물에 흘러 내려가던 바구니라고 해버린다. 그렇게 출신도 모르던 아이는 자신의 이모와 근친상간을 저질러 버리고 돼지꼬리를 가진 아이를 낳으며 부엔디아 가문은 끝을 맞이하게 된다. 그 작은 자존심 하나 때문에 일어난 비극을 보며 거짓말의 위험성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작가보다는 마술사가 되고 싶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
그는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표현하기 위한 기재로 마술적 사실주의를 차용했다. 이 책을 통해 현실을 무한히 확대하고, 현실을 재해석하는 시도를 하였다. -역자
또 이 책이 문학적 찬사를 받는 이유 중 하나는 이 책이 '마술적 사실주의'의 대표작이라는 것이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마술적 사실주의를 통해 사실과 허구를 오가면서 특정한 장면들을 더욱 사실적으로, 효과적으로 서술한다. 비현실적인 문장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더 내용에 몰입시킨다. 또 억지로 과장시켜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 논리적으로 의아한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그의 전개는 누가 꿀잼썰 풀어주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문학을 읽지 않는 사람들은 문학을 그럴듯하게 지어낸 허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오락을 위한 망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데미안>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은 이와 다르다. 소설은 하나의 실험, 시뮬레이션이라고 생각한다. 섬세하고 치밀하게 설정된 배경과 인물들을 통해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논리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명한 고전 문학들을 읽어보면 장면 하나하나가 생동감 있게 눈앞에 그려진다. 등장인물들과 물아일체가 되어 작가가 치밀하게 설계해놓은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소설이야 말로 사람을 설득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문장들은 매우 길다. 심한 경우는 한 페이지 전체를 한 문장이 다 덮는다. 그리고 책이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은 대부분은 서술이다. 대화가 거의 없어서 전개가 매우 빠르다. 정신줄 놓고 읽다 보면 사람 몇 명이 죽어 있거나 마을 전체가 바뀌어 있다. 리뷰한 사람들 중에서 어떤 사람은 책의 이러한 서술적 특징 때문에 이 책을 읽는 것은 마라톤을 뛰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나도 그 의견에 공감한다. 이 책은 진짜 미쳤다. 읽기 많이 난해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번역가도 기가 빨렸는지 당연한 맞춤법도 많이 틀려 있었라. 번역이 많이 아쉬운 책이다. 번역이 아쉬운 책들을 읽을 때마다 많은 언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어서 세계적 명저를 원서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