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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강D Oct 19. 2024

우실장과 웃기는 외야석

2막. 제주의 그라운드, 1루. ep10.

차례.     


프롤로그.

서울의 외야석

   원아웃

   투아웃

제주의 그라운드

   - 1

   - 2

   - 3

다시웃기는 외야석

에필로그.


야구장은 정말 바닷가와 멀지 않은 곳이었다. 외야에 있는 나무 사이로 파란 바다가 보였다. 가만히 있으면 파도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야구장 입구에 하루방스 선수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반갑다는 듯 버스 쪽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쪽 유니폼은 노란색이었다. 소풍 나온 병아리들 같아 보였다.

서로 아는 사이인지 만나자마자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서로 끌어안고 농담을 건넸다. 제주 방언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표정도 헤벌쭉하게 풀어져 있었다. 시합이라는 긴장된 분위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감독님, 살살해달라고. 살살.”

“우리야말로 이번엔 안 봐줄 거야.”

곰 감독이 상대팀 감독과 악수를 했다. 서로 쳐다보더니 홍홍 웃었다. 상대팀 감독도 곰 감독만큼 나이가 많아 보였다. 하지만 덩치는 여우와 곰만큼 차이가 났다. 코밑에 소심하게 기른 콧수염이 더욱 여우처럼 보이게 했다.

“자자, 다들 일렬로 서세요.”

심판이 양 팀 선수들을 불렀다. 우 실장도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 9번 우익수. 

사실 9번 타자라는 말을 듣고 자존심이 상했다. 아무리 감을 못 잡고 있다고 해도 삼류 야구팀에서 9번이라니. 하지만 양승필은 핏대를 세우며 “형, 형은 정말 야구를 모르는구나. 9번 타자가 강한 팀이 정말 강한 팀이야, 형. 형이 살아나가야 1번 타자인 나한테 기회가 오지. 형, 형이 제일 중요한 거야.”라고 주장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우선 실력으로 보여주는 수밖에. 그래도 조만간 저놈들은 제칠 수 있을 것 같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몸을 풀고 있는 양승필과 고병규에게 닿았다.

양승필은 1번 타자를 맡고 있었다. 발이 입만큼이나 빠르다고 했다.

“내가 형, 다른 사람보다 발을 더 빨리 움직이거든, 형. 아마 웬만한 사람 한번 움직일 때 두 번 움직일걸?”

양승필이 발놀림을 하면서 자랑했다. 

4번은 김만정이었다.

“오늘 바람이 많이 불잖아. 바람 부는 날엔 만정 오라방이지.”

우 실장의 물음에 라봉이 대답했다. 우 실장은 할 말을 잃었다. 바람과 타격이 무슨 상관인지…….

병살이지만 괜찮아 팀의 선공이었다. 미선을 흘끔 쳐다봤다. 미선은 라봉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못해도 세 번은 타석에 설 수 있을 것 같다.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오늘은 뭔가 보여줘야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상대팀 선발 투수가 마운드에서 섰다. 비쩍 마른 녀석이었다. 볼이 뺨에 찰싹 달라붙어서 어떤 그림에서 본 해골을 연상하게 했다. 눈도 툭 튀어나왔다. 여기에 노란색 모자는 머리에 딱 맞는 사이즈를 썼다. 머스터드소스에 찍은 멸치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멸치는 보기와 달리 좋은 공을 던졌다. 비실거리면서 쓰러질 듯 공을 던졌는데 꽤 높은 곳에서 공이 날아와 치기 쉽지 않아 보였다. 특히 직구와 함께 각도가 큰 커브볼 같은 것도 던졌다.

“플레이볼.”

심판이 우렁차게 소리쳤다. 그래도 이것도 야구라고 은근히 손에 땀이 났다. 야구라는 게임에 직접 참여한 지 대체 얼마만인지. 프로에서 쫓겨난 후로는 야구공을 손에 잡지도 않았다. 그라운드는 지긋지긋했다. 야구는 한발 떨어져서 숫자로만 봤다.

1번 타자 양승필이 타석에 섰다.

“우리 필승이 파이팅.”

미선이 양승필 쪽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양승필은 답례로 필승! 하면서 경례를 하더니 의기양양하게 타석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천천히 서서 장갑을 풀었다가 다시 끼더니 이번엔 헬멧을 벗어서 썼다 벗었다를 반복했다. 이어서 팔짝팔짝 두 번 제자리에서 뛰더니 상대팀 덕아웃을 보고 인사하듯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그리고 배트를 쭉 뻗어 외야를 가리켰다. 상대팀도 좋은 구경거리를 한다는 듯 박수를 치면서 소리를 질렀다.

“필승이 루틴은 여전히 경쾌하네.”

미선과 라봉이 까르르 웃었다. 저게 루틴이라니. 그럼 타석에 설 때마다 저 짓을 한단 말인지. 프로라면 딱 빈볼 감이다. 지켜보고 있는 우 실장이 부끄러워지는 모습이었다.

멸치가 크게 와인드업을 했다. 깡! 소리와 함께 공이 투수 쪽으로 빌빌거리면서 굴러갔다. 양승필은 공을 치자마자 전력 질주를 했다. 죽기 살기로 발을 빠르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멸치가 천천히 공을 잡아 1루로 송구했다.

“아웃!”

1루심이 펄쩍 뛰면서 외쳤다. 양승필이 1루에 절반도 가기 전이었다.

“으, 아깝다.”

“그래도 잘했다, 잘했어.”

덕아웃에서 사람들이 소리쳤다. 복귀한 양승필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해 줬다. 우 실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게 잘했다고? 완전 루저들의 동창회 같은 꼴이었다.

멸치는 이어서 두 타자를 쉽게 아웃시켰다. 다들 타이밍을 못 맞췄다. 결국 나밖에 없나. 우 실장은 모자를 쓰면서 중얼거렸다.

바로 수비 차례다. 글러브를 챙기고 모자를 눌러썼다. 그리고 외야에 섰다.

막상 서보니 외야는 생각보다 넓었다. 원래 이렇게 넓었었나. 예전에 야구할 땐 훨씬 작았던 것 같은데. 이곳 야구장은 괜찮아 팀의 야구장보다 더 큰 것 같았다.

“형,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알지?”

양승필이 멀리서 소리쳤다. 아주 멀어 보였다. 까마득한 느낌이 들었다. 공이 날아오면 잡을 수 있을까. 갑자기 무서워졌다. 다리도 후들거렸다.

그때 깡! 배트가 공을 맞히는 소리가 들렸다. 타자가 친 공이 빗맞아 우 실장 쪽으로 휘어져 날아왔다. 침착하자. 연습 때처럼. 공을 보면서 뛰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공을 쳐다보면서 뛰다가 이때다 싶었을 때 글러브를 뻗었다. 뻗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손에 뭉툭한 느낌이 들었다. 눈을 떠서 글러브를 내려 봤다. 다행히 공은 그 안에 있었다.

“나이스 플레이!”

덕아웃에서 동료들이 환호했다. 상대팀 덕아웃에서도 박수를 쳐줬다.

잡았다. 첫 공을. 아주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뿌듯했다.

“형, 그 공은 기념이야. 형, 원래 처음 수비하는 사람한테 공이 날아가는 법이거든. 최고다, 형.”

양승필이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를 해줬다. 하얀 공을 쳐다봤다. 공의 한쪽에 배트를 맞은 부분엔 검댕이가 묻어 있었다.

쳇, 이게 뭐라고.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다음 타석에선 바로 김만정이 들어섰다. 김만정은 느릿느릿 타석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한번 쳐다봤다. 바람이 불어서 헬멧 뒤로 긴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역시 만정 오라방. 바람의 방향을 보고 있어.”

옆에서 라봉이 두 손을 모은 채로 중얼거렸다. 라봉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멸치가 와인드업을 하고 공을 던졌다. 김만정이 갑자기 번트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공을 3루 쪽으로 굴렸다. 공은 떼굴떼굴 굴러갔다. 그러더니 파울 라인 바로 앞에서 교묘하게 멈췄다. 김만정은 여유 있게 1루로 들어가 바지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냈다.

“나왔다. 만정 오라방의 특기. 파울라인 따라서 굴리기.”

라봉이 소리쳤다. 김만정은 한 손을 들어서 덕아웃 쪽에 천천히 답례를 했다.

바람의 방향 어쩌니 하더니 이거였어? 우 실장은 기가 막혀서 고개를 저었다. 대체 이게 무슨 야구인가.

멸치는 자존심이 상한 듯 모자를 눌러썼다. 그리고 폼을 가다듬고 전력 피칭을 했다. 결국 다음 타자들은 전부 우수수 나가떨어졌다.

그리고 3회 초, 드디어 우 실장의 차례가 왔다.

“손님, 화이팅.”

 방망이를 들고나가는 우 실장에게 미선과 라봉이 격려를 보내줬다.

“형, 무조건 힘 빼고. 알지?”

대기 타석에서 양승필이 눈을 맞추며 소리쳤다.

타석에 섰다. 역사적인 데뷔전이다. 뭔가 보여주고 싶다. 하지만 투수 마운드가 생각보다 가까워 보였다. 멸치도 멀리서 볼 때보다 더 커 보였다. 만만한 멸치가 아니었다. 고등어는 돼 보였다.

수비처럼 하자, 수비처럼.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멸치가 와인드업을 하고 초구를 던졌다. 크게 휘둘렀다. 부웅.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스트~~라잌~~”

심판이 공중으로 펄쩍 뛰면서 경쾌하게 외쳤다. 공은 포수 미트로 쏙 들어가 있었다.

“형, 힘을 빼고.”

양승필이 대기 타석에서 소리쳤다. 

조금, 아주 약간 차이가 난 것 같았다. 감만 잡으면 저런 볼 따위야. 다시 타격 폼을 잡았다.

멸치가 크게 와인드업을 했다. 하나, 둘. 리듬에 맞춰서 크게 휘둘렀다.

“스트~~라잌~~”

심판이 아까보다 더 높게 뛰면서 소리쳤다. 이번에도 헛스윙이다.

멀리서 양승필이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다시 헬멧을 고쳐 썼다. 저런 공에 대체 왜. 왜 안 맞는 건지. 다시 한번.

부웅. 하지만 이번에도 허공을 갈랐다.

“스트~~ 라이크 아웃!”

심판이 두 번 점프를 뛰면서 신이 난 듯 외쳤다. 

우 실장은 고개를 숙이고 들어왔다. 양승필이 옆에서 계속 뭐라고 잔소리를 해댔다.

결국 이날 경기에서 우 실장은 공을 한 번 스쳐보지도 못했다. 전 타석 헛스윙 아웃. 치욕스러운 결과였다. 수비할 때 공도 처음 딱 한번 잡았을 뿐이었다. 공은 우익수 방향으로 오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병풍 같은 하루였다.

멸치는 강했다. 우 실장의 팀을 5회까지 무실점으로 막았다. 6회부터 다른 투수가 나와서 점수를 따라갔지만 역전은 무리였다.

최종 스코어는 18대 5. 완패였다. 

“두 번째 경기를 종료합니다.”

우 실장의 귓가에 멘트가 울렸지만 우 실장은 듣는 둥 마는 둥 분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지는 건 싫었다. 야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자랐다. 항상 이겨야 했다. 그게 우 실장의 야구였다. 이건 내가 알던 야구가 아니다. 

하지만 다른 팀원들은 경기 결과와 상관없다는 듯 상대팀 선수들과 시시덕거리면서 인사를 했다. 곰 감독도 여우 감독을 끌어안고 웃어댔다.

저 사람들은 자존심도 없나. 분하지도 않은지. 하긴 저런 게 패배자의 모습이다. 게임에 지고도 왜 졌는지 알지 못한다. 일등과 꼴등의 차이는 거기서 나온다.

새삼 이 팀의 현실이 느껴졌다. 루저들의 집합소. 딱 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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