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막. 제주의 그라운드, 1루. ep11.
차례.
프롤로그.
서울의 외야석
- 원아웃
- 투아웃
제주의 그라운드
- 1루
- 2루
- 3루
다시, 웃기는 외야석
에필로그, 홈.
*
영락없이 끌려온 소의 모습이다. 녀석을 본 순간 생각했다. 눈은 풀려있고 다리도 풀려있다. 코에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생긴 피어싱이 걸려 있다. 머리는 초록색이다. 우 실장이 사회에서 가장 한심하게 생각하던 부류다. 이름은 김현우라고 했다.
“원래 고등학교 때까지 야구하던 놈인데…”
아들만큼 기운이 없어 보이는 모친이 한숨을 내뱉었다. 아들 김현우는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이 없다는 듯 먼 산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쨌든 신입부원이자 팀에서 가장 막내다. 우 실장의 첫 후배이기도 했다. 운동팀 후배다. 원래 운동팀 후배들은 혹독하게 군기를 잡는 법이다.
“에이, 형. 별소리를 다하네. 여기 군기가 어디 있어, 형.”
양승필이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첫 후배인지라 신경이 쓰였다.
“원래 고등학교 때까지는 알아주는 투수였다네. 지역에서 우수투수상 같은 것도 받고 그랬대. 근데 공 좀 던지던 다른 애들처럼 얘도 만날 공을 던지다 어깨가 망가졌다나 봐, 형.”
양승필이 어디서 들었는지 귀띔했다. 얼핏 봐선 어깨를 다쳤는지 티가 나지 않았다. 일상생활을 하는 덴 지장이 없어 보였다. 풀린 눈을 보면 어깨보단 정신머리를 다친 게 아닐까 싶었다.
현우의 전담 코치는 한철이 맡기로 했다. 같은 선수 출신이니 말을 걸기도 편하지 않겠냐는 배려였다.
“잘 부탁해요.”
한철이 현우에게 생긋 웃었다. 현우는 어색한 듯 눈을 피했다. 한철은 현우에게 다가가더니 팔짱을 끼고 불펜으로 갔다. 멘토 같은 모습이었다. 처음 보는 한철의 모습이 좀 어색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같은 선수 출신인 한철의 어깨는 쌩쌩하다. 여전히 전력으로 공을 던진다. 뒤쳐진다는 게 좋은 점도 있군. 한철과 눈이 마주쳤다. 한철이 우 실장을 보더니 브이 자를 그렸다.
그래, 바보는 행복하구나. 우 실장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신입도 왔으니까 회식이에요.”
연습을 마칠 때 즈음 미선이 소리쳤다. 귀를 의심했다. 회식이라니. 내가 신입으로 왔을 땐 아무것도 없더니. 이건 명백한 차별이다.
“에이, 애잖아, 형. 형이 이해해.”
양승필에게 은근히 항의했지만 웃어넘겼다. 하지만 불쾌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미선이 양승필, 고병규를 데리고 장을 보러 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상을 차렸다.
“개그맨 오라방, 거기 테이블 좀 옮겨줘.”
라봉이 지시했다. 괘씸한 생각이 들어서 건성으로 움직였다. 플라스틱 테이블을 일부러 질질 끌었다.
“에이, 오라방. 뭐 그렇게 힘이 약해.”
라봉이 달려와서 거들었다. 라봉도 미웠다.
미선 네가 사 온건 바비큐였다. 흑돼지에 각종 쌈 채소를 가져왔다.
“여기 흑돼지는 정 씨 아저씨 네서 산거고, 쌈 채소는 한수 옹 제공이고…”
미선이 식재료를 나열하면서 설명했다. 그런데 쭉 펼치니 음식이 너무 많았다.
“이걸 다 먹는단 말이야? 누가 다 먹어?”
우 실장이 깜짝 놀라 물으니 양승필이 상추 한 잎을 우적거리며 대답했다.
“에이, 형. 우리가 다 먹지, 형. 원래 우리 곰 감독님 지론이 음식은 남더라도 배고프면 안 된다는 거야, 형.”
역시 보기만큼 먹성도 좋은 영감인 것 같았다.
상거리를 차리고 자리를 잡았다. 고기 굽는 건 어린 녀석들이 했다. 나이 먹어서 좋은 점이다. 고기 굽는 건 질색이다. 사회생활하면서 구운 삼겹살만 모아도 한 트럭은 될 터였다.
자리를 잡다 보니 현우의 맞은편에 앉게 됐다. 괜히 헛기침을 한번 했다. 하지만 현우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사회성 제로인 녀석이다.
가까이에서 보니 더 불량스럽게 보였다. 눈은 풀려서 패기라는 게 전혀 없어 보였다.
“자자, 어르신부터 드세요.”
라봉이 고기를 한 접시 가져왔다.
현우는 미동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짜식, 한 입 먹어보라고 권해야 하나. 현우를 쳐다봤다. 그때 현우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우 실장을 쳐다봤다. 우 실장도 당황해서 그대로 시선을 마주쳤다. 본의 아니게 눈싸움을 하는 모양이 됐다.
순간 녀석의 눈빛이 살아났다. 어라, 저놈이. 움찔했지만 피하긴 싫었다. 그러자 녀석은 눈에 더욱 힘을 줬다. 눈에 살기가 어렸다. 슬쩍 뒷골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요즘 젊은 녀석들은 무서운 것도 없다는데.
“뭐 해, 인마. 안 먹고.”
마침 곰 감독이 쓱 다가와 우 실장의 어깨를 툭 쳤다. 덕분에 눈싸움에서 피할 명분이 생겼다. 재빨리 고기를 가져가 입에 넣었다. 고기의 식감이 느껴졌다. 쫀득했다. 이어서 고소한 기운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이거 맛있잖아! 감탄이 나왔다. 이번엔 한 점 더 싸서 앞에 있는 멜젓에 찍었다. 한 입 베어 물려다 곰 감독이 의식됐다.
“저기… 안 드세요?”
아직 감독이라는 호칭을 하지 않다 보니 말이 어색하게 나왔다. 곰 감독은 그러거나 말거나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너나 많이 먹어, 인마.”
그리고 방귀를 뿡 뀌고 사라졌다.
순간 현우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콜록하고 기침도 했다. 동지를 만난 기분이 들었다. 그래, 내 귀가 잘못된 게 아니었어. 현우를 보고 슬쩍 고개를 끄덕이고 코를 쥐는 흉내를 냈다. 녀석도 피식 웃었다.
“우리 감독님 고기 안 먹잖아, 형.”
남 얘기하기 달인 양승필이 어느새 옆에 와서 고기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래? 그럼 본인이 안 먹는데도 회식 메뉴를 고기로 한단 말이야?”
“그래도 팀원들이 좋아하니까. 윗사람들은 원래 그런 거 아닌가.”
윗사람은 그렇지 않다. 회식 메뉴는 원래 윗사람의 취향을 따라간다. 우 실장은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해왔다.
“원래 육식을 엄청 좋아했대. 지금보다 체중도 삼십 킬로 이상은 더 나갔고. 고등학교 리그에선 나름 유명한 감독이었거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었을 거 아냐? 그런데 매년 성적은 잘 뽑았는데, 문제가 하나 있었대. 투수 혹사. 한번 찍은 녀석은 선발로도 나가고, 불펜으로도 나가고, 이기면 이긴다고 나가고, 지면 잘 져야 된다고 나가고. 여하튼 곰 감독 밑에서 2년 이상 버틴 투수가 없는 거야. 그 덕분에 감독님 별명이 ‘곰 감독’도 있었지만 ‘킬러곰’도 있었어. 애들은 다 그렇게 불렀대.”
양승필이 침을 튀기며 말했다. 중간에 혼자 막걸리도 곁들였다. 라봉이 다가와서 “양승필, 이제 니가 고기 구울 차례야!”하고 윽박질렀지만 “나 지금 형이랑 중요한 얘기 중이란 말이야”라며 손을 저었다.
양승필은 막걸리를 다시 한 모금 꿀꺽 넘기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대단한 비밀을 누설한다는 듯 속삭였다.
“그러다 어느 해인가 감독님을 유독 따르는 신인 투수가 하나 있었나 봐. 성격도 서글서글한 게 다른 선수들은 감독님 무서워서 얼씬도 못하는데, 녀석은 어버이날에 ‘아버님!’하면서 전화도 하고 말이야. 감독님을 꽤 따랐나 봐. 감독님도 귀여웠겠지. 야구도 잘하는 녀석이 성격도 좋으니까. 그래서 눈에 띄었는데, 그게 독이 됐다나 봐. 말 그대로 그 녀석은 그해 거의 전경기에 나갔대. 갓 들어온 녀석이 뭘 알겠어. 그냥 나가라니까 계속 나갔겠지. 그런데 어느 날 녀석의 어깨가 뚝하고 고장 나 버린 거지. 한동안 재기한다고 노력 좀 했던 것 같은데, 한번 끊어진 어깨가 쉽게 낫겠어? 딱 육 개월이었어. 녀석이 빛났던 건. 그리고 사라졌지. 원래 프로에서도 탐내던 녀석이었는데.
그런데 말이야. 형도 신문 기사를 봤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어떤 촉망받던 엘리트 야구 선수가 생활고를 못 이겨서 도둑질을 하다가 우발적으로 살인까지 했다는 기사 말이야. 본 적 있지? 그게 그 녀석이었던 거지. 그때 곰 감독도 뭔가 느낀 게 있었나 봐. 바로 감독을 그만두고 모든 걸 정리하고 여기 제주도로 내려왔대. 그 이후로 술도 끊고, 고기도 끊고, 그렇게 지낸다네.”
양승필은 고기를 우물거리며 떠들었다. 역시 남 얘기하기 챔피언다운 모습이었다.
그나저나 곰 감독도 한때는 꽤 알아줬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모든 걸 버리고 여기까지 왔다는 말엔 동질감도 느껴졌다.
곰 감독은 멀리서 한수 옹과 잡담을 하면서 히죽거리고 있었다. 곰 감독의 넓은 등판이 들썩거렸다. 어쩌면 모든 걸 버린 지금이 더 속 편할지도 모르겠네. 우 실장은 곰 감독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막걸리를 홀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