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막. 제주의 그라운드, 1루. ep12.
차례.
프롤로그.
서울의 외야석
- 원아웃
- 투아웃
제주의 그라운드
- 1루
- 2루
- 3루
다시, 웃기는 외야석
에필로그, 홈.
*
곰 감독은 이상하게도 현우를 잘 살폈다. 현우의 가능성을 봤는지 섬세하게 지도했다. 한때 명감독의 감일지도 몰랐다. 그래서인지 현우도 꾸준히 연습에 나왔다. 여전히 평상시에는 눈이 풀려있었지만 연습을 할 땐 눈빛이 살아났다.
포지션은 1루수로 바꿨다. 어깨가 고장 났지만 송구를 최소화할 수 있는 자리였다.
우선은 공을 잡는 것부터 시작했다. 펑고는 한철이 했다.
“자, 우선 번트 타구부터요.”
한철이 천천히 타구를 굴렸다. 하지만 달려오던 현우는 공을 놓치더니 소리를 질렀다.
“아이 씨!”
혼잣말로 짜증을 내면서 발로 흙을 걷어찼다. 성격이 여간하지 않은 것 같았다.
“짜식, 성질 하고는.”
우 실장은 괜히 기분이 좋아서 히죽 웃었다. 미선이 옆에서 그 소리를 들었는지 빙긋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저런 애들이 더 잘할 수 있어요. 그렇게 잘하던 애라던데 얼마나 아쉽겠어요.”
눈가가 금방 그렁그렁해졌다. 원래 감정이 오락가락하는 여자였지만 여기선 십 대 감성이다.
“자, 한 번 더.”
한철이 다시 땅볼을 쳐줬다. 이번엔 현우의 글러브에 세이프.
“나이스 플레이!”
한철이 크게 외쳤다.
“나이스 플레이!”
다른 사람들도 따라서 소리쳤다. 현우는 쑥스럽다는 듯 콧잔등을 간질였다. 그 모습을 보니 조금 귀여워 보였다.
다음은 뜬 공 처리 훈련. 이번엔 외야수들도 함께 했다.
현우는 1루에, 우 실장은 우익수 쪽에 자리를 잡았다. 마찬가지로 펑고는 한철이 담당했다. 이 팀에서 가장 정확하게 펑고를 칠 수 있는 펑고의 달인이다.
“자, 퍼스트!”
한철이 소리를 지르면서 공을 쳤다. 공은 바닥을 크게 튕겨서 1루 쪽으로 날아갔다. 현우는 뒤뚱거리면서 다가왔다. 하지만 공은 글러브에 맞고 땅에 떨어졌다.
“에이 씨!”
또 화를 낸다. 참을성이 없는 놈이다. 선출이라더니 수비는 완전 애송이다.
“이번엔 라이트!”
한철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자리를 잡았다. 깡! 소리와 함께 공이 날아왔다. 자, 앞뒤로 요리조리. 그리고 척. 공은 글러브로 쏙 들어갔다.
음하하. 속으로 웃으며 현우를 봤다. 나이 먹은 아저씨한테 당한 소감이 어떠냐. 우 실장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현우는 우 실장을 흘끔 보더니 입술을 삐죽거렸다.
하지만 녀석의 배팅은 제법이었다. 한철이 던진 공을 바로 받아서 쳤다. 타구는 라인드라이브로 외야로 날아갔다. 타석은 왼쪽이었다.
“와아!”
다들 감탄하면서 쳐다봤다. 현우는 수비도 금방 적응했다. 원래 운동 신경이 있던 녀석이었다.
“자, 갑니다.”
한철도 마음껏 펑고를 쳤다. 스핀이 걸린 공을 야금야금 잡아냈다. 가끔 다리를 쭉 찢으며 공을 잡아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미 우 실장의 존재는 초월한 지 오래였다. 십 년만 어렸어도… 우 실장은 분한 기분이 들었다.
“재능이 있대. 야구 야이큐가 다른 거지. 원래 야잘잘이라고, 야구는 잘하는 녀석들이 잘하잖아, 형.”
양승필이 부러운 듯 중얼거렸다. 신은 저 녀석에게 야구라는 재능을 선물한 모양이다. 삐뚤어진 성격과 함께.
아주 늦은 시간까지 훈련을 한 날이었다. 붉은 해는 벌써 한라산 끝에 걸려 있었다. 사방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우 실장은 가방을 챙겨서 나오다가 그 모습을 봤다.
깡깡. 그라운드에서 소리가 들렸다.
현우는 그때까지 훈련을 하고 있었다. 한철이 공을 던지고 곰 감독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주변이 어두워서 간신히 공이 보일 정도였다.
헉헉 숨을 내쉬는 소리와 공을 맞히는 소리만 들렸다. 묘한 광경이었다. 아름답다. 외야로 뻗는 타구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현우의 타구는 더욱 멀리 뻗어갔다. 공은 외야를 향해 쭉 날아갔다.
“오늘은 됐다.”
곰 감독이 소리쳤다. 그리고 수고했다는 듯 박수를 치고 자리를 떴다.
현우는 그제야 숨을 골랐다. 온몸이 땀투성이였다. 한철이 다가와 수건을 건넸다.
“형, 감독님이 재능이 있대요. 일단 이렇게 해보죠.”
한철이 웃어 보였다. 한철의 칭찬에 현우도 씨익 웃어 보였다. 녀석이 웃는 건 처음 봤다. 저 녀석도 야구 좋아하는 꼬맹이로군. 우 실장은 잠시 현우의 얼굴을 쳐다보다 가방을 챙겼다.
*
시간이 흘러 매미가 우는 계절이 왔다. 경기는 어느새 일곱 번을 마쳤다. 이제 딱 두 번이다. 이것만 마치면 현실로 돌아갈 수 있는 걸까. 우실장은 기대되면서도 왠지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현우의 발전은 놀라웠다. 이젠 배팅볼 정도는 우습게 친다. 원하는 곳으로 공을 보낸다. 타고난 재능이 달랐다. 신은 녀석에게 야구라는 선물을 줬다.
그리고 신은 한수 옹에게 목공의 능력을 줬다. 한수 옹은 손재주가 상당했다. 힘도 좋아 무거운 자재를 번쩍 들어 올렸다.
카페의 외관이 서서히 드러났다. 카페는 단층이다. 1층은 돌과 시멘트를 섞어서 올리고 한가운데 기둥을 세웠다. 마을 쪽으로 커다란 창도 만들었다. 나무를 손봐서 한수 옹이 직접 만들었다.
창 색깔은 파란색이다.
“핑크, 핑크색으로 하자.” 한별이 졸랐지만 다른 사람들은 만장일치로 파란색에 표를 던졌다. 우 실장도 한 표 행사했다. “파란색을 보면 마음이 넓어지잖아요”라는 미선의 말 때문이었다. 선택은 옳은 것 같다. 흰색 돌담 위에 파란색 창문.
카페 위층은 개방형이다. 주변에 안전대를 설치하고 올라가는 계단도 만든다고 했다. 나름 루프탑인 셈이다.
“아저씨, 우리 카페 만들면 언제 올라가서 같이 바다 구경해요. 어때요?”
한철이 바닷가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위층에서 보는 풍경이라… 우 실장은 그 모습을 상상했다. 꽤 근사할 것 같았다.
한수 옹은 여전히 우 실장에게 싸늘했다. 이젠 그런가 보다 한다. 원래 그런 성격인 것 같았다. 그래도 최근엔 둘이 제법 호흡이 맞는다. 한수 옹이 두리번거리면 우 실장이 찾아준다. 무거운 물건 앞에선 괜히 한번 끙 하고 사인을 준다. 그러면 우 실장이 못 이긴 척 옆에서 돕는다.
어색한 분위기는 라디오가 달래줬다. 작업할 때 항상 멀찍이 라디오를 틀어 놨다. 주변의 소음과 라디오 소리가 함께 들렸다. 제법 듣기 좋았다. 가끔 옛날 우 실장이 즐겨 듣던 노래가 나오면 잠깐 작업을 멈추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시끄러운 DJ의 만담에도 익숙해졌다. 듣다 보니 개그에 적응된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한수 옹은 따로 취미가 있었다. 틈이 날 때마다 바다에 나가서 낚시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재밌는 게 뭔지 아세요?”
언젠가 미선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속삭였다.
“글쎄… 막상 한수 옹은 물을 무서워한다는 거예요.”
미선이 입을 가리고 웃으며 말했다. 아니, 낚시가 취미인 양반이 물을 무서워한다니 말이 되나. 우 실장도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왔다.
“수영도 못 한다는 소문이 있어요. 근데 낚시는 그렇게 좋아한대요. 바다를 보면 마음이 편해진다나, 뭐라나…”
미선이 웃으면서 우 실장 팔을 툭 쳤다. 은근히 아파서 팔을 문질렀다. 하여간 옆 사람 때리는 걸 좋아하는 여자다.
카페 공사엔 미선 네도 함께 했다. 미선과 한별은 음식을 가져오고 페인트칠을 했다. 물론 한별은 여기서도 그대로다. 끈기가 약하다. 페인트 붓을 잡고 있는가 싶더니 돌아보면 어디로 도망갔다. 원래 지루한 걸 싫어하는 애다.
한철도 학교를 가지 않을 땐 같이 와서 거들었다. 한철과 함께 땀을 흘리다 보니 조금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미선은… 바람은 아닌 것 같다. 혐의를 입증할 수 없다. 게스트하우스와 야구장이 전부다. 그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그냥 사람이 바뀐 걸로 결론을 내렸다. 미선과 아이들은 얼굴만 그대로이지 전혀 다른 사람들이다.
원래 이런 모습일지도 몰라. 우 실장도 인정했다. 여기 제주에선 원래의 모습대로 살아가는 것인지도.
그렇다면 서울에선 왜 그렇게 꽁꽁 감춰놓았던 걸까. 아니면 자신만 몰랐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서글퍼졌다.
평생 가족을 위해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일상에 바빠서 신경은 못 쓰고 살았지만 마음만은 그렇지 않았다. 은퇴만 하면… 하고 혼자 다짐을 하곤 했다.
사회의 꼭대기에 서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거기에 모든 걸 걸었다. 그런데 그 삶이 잘못됐다는 말인가.
우 실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건 아니다. 인정할 수 없다. 인정하는 순간 나의 삶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