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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걷는 시간, 그 흔적을 찾는 공간

01. 금요일의 시작 – 멈춰 있는 나를 흔드는 서점

by 이서

- mini prolog -

기억은 가끔 시간을 멈춘 장소를 만들어낸다.

그곳에서 나는 다시 한 번, 잃어버린 사랑의 그림자를 마주하게 된다.


그녀를 잃은 뒤로,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현실의 시계는 부지런히 흘렀지만, 내 삶은 오래된 기억에 묶여 멈춰 있었다.

색은 바래고, 소리는 희미해졌다.

월요일 아침의 무거움과, 목요일 밤의 긴 침묵.

그 고통을 견디는 동안, 내 삶의 시간은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금요일이 오면, 나는 어김없이 그 기억의 공간으로 향했다.

스스로의 탐닉이자, 유일한 탈출구였기에.

어디인지도 알 수 없는 도시의 가장자리, 낡고 오래된 주택가 뒤편.

간판도, 불빛도 희미한 작은 서점이 어둠 속에 숨어 있었다.

그 문은 마치 내가 찾아오기를 기다린 듯 고요히 닫혀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잡았다.

이 문을 열지 않으면, 또다시 한 주를 버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삐걱.

낡은 문이 열리는 순간, 바깥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차 소리, 바람, 사람들의 웅성거림까지 한 겹씩 벗겨지듯 사라졌다.

내 긴장 섞인 호흡과 심장 박동만이 나를 이곳에 붙잡고 있었다.

서점 안의 공기는 눅눅하고 차가웠다.

마치 수백 년의 시간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질감 같았다.

창문 틈으로 알 수 없는 희뿌연 빛이 스며들었다.

책장과 가구의 모서리마다 희미한 잔상이 흐르고, 공간 전체가 익숙한 하나의 ‘기억’처럼 느껴졌다.

시선이 한 지점에 닿는 순간, 잔상의 흐름이 잠시 멈췄다.

그리고 그 중심에, 그가 있었다.

창가에 비스듬히 앉아 두꺼운 책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머리, 매끄럽게 다듬어진 턱선.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할 수 없는 모호한 실루엣.

그 얼굴에는 낯설고도 익숙한 무언가가 깃들어 있었다.

사랑했던 순간들의 잔상, 설명할 수 없는 아련함이 겹쳐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깊고 고요한 눈빛이 나를 향했다.

차가움과 따뜻함이 공존하는 시선.

나는 그 눈을 오래 바라보다가, 그제야 그의 이름을 떠올렸다.

에일.


"왔군요. 현실을 견디지 못해 만든 당신의 서점으로."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간은 멈춰 있었지만, 그의 말은 파문처럼 번졌다.


"당신이 원하는 건 흔적인가요? 아니면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부정할 방법인가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이미 내가 품고 온 갈증을 알고 있는 듯했다.

겨우 입술을 열었을 때,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작았다.


“… 그녀가 왜 떠났는지, 그냥 알고 싶을 뿐이에요. 그 이상은 아니에요.”


그는 내 모순된 말에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차가운 얼굴에 서린 미소였지만, 눈빛은 알 수 없는 슬픔을 품고 있었다.


“좋아요. 당신은 그저 기억의 한편으로 들어갈 수 있을 뿐입니다.

그 안에서 무엇이든 바꾸려 해선 안 돼요.

개입하는 순간, 당신이 원하는 방식으로는 그 기억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될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그의 말에 대한 형식적인 동의일 뿐이었다.

그는 서점의 한쪽 책장 구석을 가리켰다.


“당신의 미련이 가장 짙게 남은 책을 고르세요. 그 순간부터 여정이 시작될 거예요.”


내 시선은 곧 낡고 바랜 책 한 권에 닿았다. [파도 소리만 남은 밤의 침묵].

그 책을 들어 올리는 순간, 에일의 목소리가 다시 흘렀다.


“기억은 당신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요. 그곳에서 당신은 같은 고통만 반복하게 될 겁니다.”


나는 그의 말이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내 심장은 그의 경고와 무관하게 빠르게 뛰고 있었다.

책장을 펼쳤다. 종이 냄새가 아니라, 오래된 미련의 냄새가 퍼졌다.

그리고 나는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금요일의 밤, 나의 탐닉이 속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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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