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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걷는 시간, 그 흔적을 찾는 공간

02. 파도 소리만 남은 밤의 침묵

by 이서

- mini prolog -

바다는 모든 감정을 삼키고도 끝내 파도 소리만 남긴다.

나는 그 잔향 속에서 잃어버린 마음의 조각을 다시 듣는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오래전 그 바다의 기억 속에 있었다.

공기에는 짠내 대신 오래된 그리움이 섞여 있었고, 파도 소리는 누군가의 숨소리처럼 부드럽게 들려왔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모든 색이 조금 더 옅고, 소리가 느릿하게 들릴 뿐이었다.

나는 이곳을 또다시 마주하고 있었다. 매번 같은 파도, 같은 바람, 같은 어둠 속에서 나는 늘 이 자리를 찾아왔었다.

그녀와 나란히 앉아 함께 했던 밤, 바다와 밤하늘 별빛을 닮은 그녀의 눈빛, 그래서 우리 사이의 모든 시간에서 가장 찬란했던 순간.

그날 이후, 나는 늘 이 바다의 모든 것에 매달려 잠이 들곤 했다.

이곳은 그녀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존재했던 시간이었다.

발끝으로 차가운 파도가 밀려와 이내 나의 발목을 스치자, 그 순간, 오래 잠들어 있던 기억의 파편이 되살아났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웃던 얼굴.

세상 아름답던 그 웃음 뒤에 숨어 있던 슬픔을, 그때는 미처 보지 못했다.


“이 밤이 지나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그녀의 목소리가 바람에 섞여 흩어졌다.

나는 그때도, 지금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언제나 넌 멈춰 있어. 그게 나를 아프게 해.”


그녀는 천천히 내 곁을 지나, 어둠 쪽으로 걸어갔다.

그 말은 끝내 내 안에서만 맴돌았다. 마치 내가 나에게 던진 문장처럼.

나는 마지막 그날처럼 또다시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손끝이 떨렸지만, 에일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 어떤 시도도 해서는 안 돼요. 개입하려는 순간, 당신은 이곳에서 헤어날 수 없어요.’


나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녀의 뒷모습은 점점 멀어졌고, 곧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모래 위엔 얕게 파인 발자국 하나, 그리고 조용한 침묵만 남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바다의 색이 바뀌고, 하늘이 흐릿해지더니, 이내 모든 것이 정지했다.

그때, 모든 정적을 깨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향을 알 수 없었지만, 그건 분명 에일의 음성이었다.


“이 장면을 몇 번이나 반복해야 할까요?”


뒤돌아보니, 에일이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엔 감정이 없었지만, 그 눈빛은 어딘가 깊은 연민을 담고 있었다.


“그녀는 매번 같은 자리에 존재하죠. 당신이 이곳을 떠나지 못하게 막는 그림자처럼.

하지만, 이게 정말 그녀일까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모든 건 내 욕망이 만들어낸 환영이라는 뜻이었다.


“이건 그저 기억이에요. 살아 있는 현실이 아니죠.”


에일이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그런데도 당신은 매번 이 바닷가로 들어오죠.”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가 살며시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의 손은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그저 존재한다는 느낌만이 있었다.


“그녀는 이미 당신 안에서 끝났어요. 당신도 알고 있죠.”


그의 목소리가 바람에 섞였다.


“당신은 여전히 그녀와의 기억을 붙잡고 바꾸려 하죠.

하지만 기억은, 시간이 흘러가듯 그저 걸어가야 하는 길일뿐이에요.”


그 말이 끝나자, 바람이 일었다.

모래가 흩어지고, 파도 소리마저 사라졌다.

모든 것이 희미해지더니, 나는 다시 어둠 속에 휩싸였다.

눈을 뜨자, 나는 서점 안에 있었다.

책장은 여전히 조용했고, 시간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내 안에는 무언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주 작지만 분명한 균열.

그 미세한 틈이 내 다음 금요일을 예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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