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밀의 언덕"(2022)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족의 품을 떠나 또래 친구들을 만나며 처음으로 넓은 세상을 경험한다. 보호자의 관심과 사랑을 받기 위해 거짓으로 울고 웃던 아이는 친구들과 선생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 거짓말을 시작한다. 가짜를 그럴듯한 진실로 위장하는 데에는 더 많은 거짓말이 동원될 때도 있다. 덕지덕지 쌓아 올린 모래성 안에서 아이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을 경험한다. 조금 더 자라면서 우리는 진실을 필요한 만큼 숨기는 법을 알게 된다. 그리 중요한 사안이 아니라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적당히 넘어가는 것. 누군가가 너무 꼴 보기 싫지만, 늘 마주쳐야 하는 사회적 관계를 고려해 오늘도 온 힘을 다해 웃어 보이는 것. 하지만 반쪽짜리 얼굴로 존재하는 게 어쩐지 달갑지는 않다. 솔직함과 거짓말, 우리는 이 가운데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 걸까?
영화가 가장 필요했던 순간, 운 좋게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이지은 감독의 GV와 함께한 <비밀의 언덕>을 만났다. 가족과 글쓰기, 그 가운데 세상을 알아가는 한 소녀. 신기할 정도로 요즘의 화두와 맞닿아 있는 키워드가 많았다. 또 다른 '나'와 마주하기를 고대하며, 어떤 섬세함이 나의 무자비한 갈증을 덜어줄지 궁금했다. 그렇게 퍼붓는 비를 헤치고 도착한 극장에서 자신에게 비밀스러운 시간을 선물했다.
감수성이 풍부한 초등학교 5학년 '명은'은 글쓰기를 매개로 가족 바깥의 세상과 관계를 맺으며 성장한다. 여전히 어린 나이지만 한편으로는 철이 들기 시작하는 나이, 12살. 우리 모두가 어린 시절 순수함과 영악함을 오갔듯이 주인공 명은뿐만 아니라 모든 등장인물들은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완벽한 가족, 모자람 없는 사랑, 긍정적인 가치들. 처음 글쓰기대회에 도전장을 내밀었을 때 명은은 그럴싸한 좋은 문장들로 자신을 치장한다. 그리고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짜 가족의 증거를 만들어내며 인정받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어느 날, 승승장구하던 명은 앞에 글짓기 라이벌 듀오가 나타난다. 혜진과 하얀. 모범적인 문장으로 채워진 명은의 글은 아이들의 하품을 자아내지만, 아프고 상처받은 현실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는 혜진과 하얀의 글은 까불던 아이들마저 귀를 기울이게 한다. 라이벌에서 친구 관계로 발전해 나가며 명은은 '솔직함'의 힘을 깨닫는다. 그리고 중요한 글짓기 대회에서 처음으로 진실을 마주하는 글쓰기를 시험한다.
미움과 상처, 질투와 좌절의 언덕은 어린 시절과 사춘기를 지나 삶의 곳곳에 나타난다. 외동딸로 부족함 없이 자란 초등학교 시절, 하늘을 찌르는 오만함에 반 아이들의 미움을 산 적이 있다. 아홉 살에 다수의 타인으로부터 외면당하는 기분은 처음이라 큰 상처를 느꼈다. 사랑만 받던 아이에게 찾아온 차가운 눈빛들은 나의 성격을 순식간에 내성적으로 변하게 했다. 주변 눈치를 살피며 위축된, 새로운 버전의 내 모습은 사춘기와 함께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발칙하고 당돌했던 어렸을 적 자신감의 3분의 1만 되찾아도 매력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지금까지도 '자연스러운 나'를 갈망하며 내 안에 꽁꽁 숨겨둔 소녀를 되찾고 있다.
명은은 눈앞에 놓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 중에 다양한 어른들을 만난다. 그들은 절박한 소녀에게 적절한 순간 적절한 도움을 준다. 마치 퀘스트를 깨기 위해 반드시 만나야 하는 NPC들처럼. 돌이켜보면 나에게도 깜깜하고 막막했던 순간에 도움을 준 어른들이 있었다. 채린이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처음 이야기해 준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 인문학과 예술적인 삶에 눈을 뜨게 해 주신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 두 분, 하고 싶은 일을 그저 해나갈 수 있게 응원해 주신 진주의 멋진 어른들, 언어의 섬세함을 알게 해 주신 송무 교수님, 주위의 멋진 기록자 친구들과 책과 영화에서 만난 작가와 인물들까지도. 성장통이라는 언덕을 넘는 중에 얻는 귀한 지점들이다.
글 안에서 진실을 마주하는 법을 알게 된 명은은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글쓰기를 경험한다. 이제 영화를 본 이들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그래서 솔직한 글쓰기가 좋은 글쓰기인가요? 거짓말과 솔직함, 어느 편에 서야하나요? 이 물음에 감독은 이렇게 답한다. "무엇이 좋은 걸까, 답을 듣고 싶은 마음이 영화를 끝까지 붙들게 하는 동력이 되었어요. 나는 거짓과 솔직함이 섞인 글쓰기가 좋아요."
혜진과 하얀이 일찌감치 깨달은 것처럼 '솔직함'은 무서운 도구다. 이는 '진정성'과도 이어지고, 삶을 드러내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마음이 투명하지 못한 게 치명적인 결함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낡은 줄에 의지한 채 번지점프를 앞두고 있는 사람처럼 솔직해지기 위해 심호흡을 고르던 나에게 이지은 감독의 대답은 새로운 관점을 안겨주었다. 내가 서 있는 곳이 몸이 바스러질지도 모르는 천리 절벽 산중 낭떠러지가 아니라, 깊은 바다가 넘실대는 탁 트인 해안이었다는 듯이. 물속에 꼬르륵 잠시 잠겨 있다가 그저 수면 위로 다시 떠오르면 되는 일이었다.
쓰고 싶은 글이 있었는데, 얼만큼 솔직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오랜 기간 미뤘던 적이 있었다. 마음껏 쏟아낼 수 없는 불편한 마음이 뭘까 생각을 하다가 '독자를 염두에 둔 글쓰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경어체 안에서는 누군가에게 말하는 듯한 어투를 써야 하기에 내가 원하는 감도가 나오기 어려웠다. 솔직함을 제대로 발현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모든 문체를 일기체로 변경하기로 했다. 그러니 마음이 한결 편안했다. 지금껏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다가 훌렁 내던진 기분이었다.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담담한 문체를 이어오고 있다.
온라인에 마련한 다양한 공간이 나에게는 비밀의 언덕이자 섬이다. 원고지에 연필로만 글을 쓰던 명은이 백지에 색연필과 사인펜으로 자유로운 기록들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처럼, 나의 공간에서라도 마음껏 자유롭기로 한다. 외부 세계에 대한 관심과 내면을 향한 눈길이 우리 안에서 자유로이 드나들 때 존재는 팽창하며 숲을 이룬다. 활짝 웃으며 신명 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명은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