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의 수명은?

채미자, 2013년 3월 11일

by 채미자

소리는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태어난 것들의 공통어지 싶다. 생겨난 무생물도 세월이 흐를수록 움직이면서 부식되기 때문에 생명체가 아니던가, 그 모두 부딪히거나 때리면 소리 나고, 부서질 때 비명을 지른다. 소리로 태어나서 서로 소통 할 수 있도록 조절한 말, 희로애락을 거머쥔 그 비범한 위력과 활동하는 범위와 수명의 길이를 상상해본다.

추석전날 오후, 가랑비 바람이 세게 불었다. 알밤이 쏟아졌을 것 같아서, 집 모퉁이 돌아서 200미터쯤에 있는 산밤나무 군락으로 갔다. 예상대로 통통한 알밤이 바닥에 빨갛게 널려 있었다. 웬 횡재냐고 줍고 있는 그때, 머리위에서 어른 남녀어린아이의 웃음소리가 났다. 밤 철이면 밤 줍는 사람들로 빈번한 곳이라 그 사람들의 웃음소리겠지 하고 밤 줍는 데만 정신 팔려 있었다. 빗줄기가 굵어지면서 잠바 모자를 뒤집어쓰고 줍고 있는데 그 웃음소리가 또 들려왔다. 그냥 무시하려다가 이비 오는데 하고 고개를 들었다. 섬뜩할 정도로 음습한 묘지 셋뿐이었다. 동작을 멈춘 채, 움켜 쥔 밤을 더욱 꼭 쥐었다. 그 음산한 적막의 시선이 집중될까 봐 숨소리도 죽였다. 온몸의 근육이 빳빳해졌다. 그 묘지를 통과해야 집에 가는데 발이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 한 발짝 두 발짝 묘지를 지나치려는데 무엇이 발뒤꿈치를 꽉 잡아당겼다. 아찔하면서 발이 땅에 딱 붙어버렸다. 어떻게 를 되뇌다 의식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 때였다. 캄캄한 머릿속이 쌍 나이트 킨 것처럼 환해졌다. 딴 곳에서 나는 웃음소리가 빗줄 전파를 타고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진실로 믿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눌눌라라 집으로 돌아왔다. 위급한 상황에선 불분명한 믿음도 확신 할 수 있나보다 그 처지에서 본능적으로 스스로를 지키고자하는 강렬한 방어력 이였을까? 그래서 항간에 광신도가 생기는 것일까? 살아오면서 때로는, 절박하거나 절망 할 때마다 돌파구가 생기지 않던가, 그럴 때, 사람들은 조상 덕이니, 자기가 믿는 종교 덕이니 하며 잠재력을 배재해버린다. 석가가 한 말 중에 유명한 말이 있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자신만이 존귀하단다. 또한 생명 하나하나가 소우주란 말도 있다. 종교관은 없지만 왠지 다양한 소리를 낼 수 있고, 시공간을 초월하여 자유자재 할 수 있는 마음과 스스로를 치유하고 지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춘 사람, 예사롭지 않다고 느껴진다. 우주가 하나의 큰 생명이라면 사람도 작은 우주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려선 어두워지면 귀신들이 들끓을 것 같아서 문밖에도 못 나갔다. 지금도 어둠속엔 그 무엇이 지켜보는 것 같고 어떤 모의가 벌어지는 것 같다.

웃음사건 이후 10일 쯤 되었을까? 또 그때 그 웃음소리가 그 방향에서 들려왔다. 좀 멀리 들리기는 하지만 톤이나 음정이 그때와 똑같은 웃음소리였다. 담장너머로 그 곳을 보았다. 묘에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며 더러는 삽질을 하고 있었다. 아들이 서울대수석합격해서 조상 산소에 뗏장을 입힌다는 50대여인, 음식을 차려주며 먹으라고 하는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그렇다면 추석전날 동기간들이 모여서 조상 덕이라며 산소복원상의하며 웃는 소리가 묘까지 찾아 온 것일까? 아무튼 원인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무질서한 것 같으나 질서정연한, 우연인 것 같으나 필연인, 텅 빈 것 같으나 무수한 인연들이 꽉 들어 찬 우주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을 좁쌀만 한 두뇌와 시선으로 한치 앞도 모르면서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무질서와 우연이란 말은 게으른 사람들이 대충하는 부정적인 변명이 아닐까? 풀잎 하나도 필연으로 생겨났고 질서정연하지 않던가,

해질 무렵 혼자 덕포진 바닷가 산책길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덕포진 쪽에서 아우성이 아득하게 들려왔다. 뒤돌아서 귀 기울였다 또 들려왔다. 전쟁 아우성 같았다. 병인양요난이 언제인데 지금 그 소리가 들리는가, 그 속에는 양헌수 장군의 함성도 들어 있으리라 덕포진 바닷가를 산책 할 때면 그분의 한시 (상 마 망 유 가출 성망 유신, <上 馬 望 有 加出 星芒 維新>말에 오르며 가족을 잊었고 성을 나서며 나를 잊었노라’)를 되새겨보곤 한다. 세월이 흘렀어도 지금 듣는 것처럼 가슴이 뭉글해진다. 그 난의 소리가 어디에 머물렀다가 지금 들리는가, 그런 소리는 밤 주을 때도, 지금도 왜? 한번 더들리는 걸일까? 그 또한 기연가미연가 하는 어설픈 나에게 확신을 심어주기위한 필연이 아니었을까?

소리의 층, 천둥소리 층부터 쌓인 명주실 층처럼 겨우 들리는 발밑에 아주 작은 벌레소리 층까지 들을 수 있다. 벌레소리를 천둥소리같이 듣는 생명도 있지 않을까? 한번 태어난 소리들이 허공의 바다로 파장처럼 퍼져 숲, 돌, 물에 깃들었다가 기후환경에 따라 본래의 소리로 뭉쳐 아득하게 또는 가깝게 들리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며 사는 것일까? 눈을 감고 귀 기울이면 아주 작은 수많은 소리파장이 물처럼 흘러간다. 내장이 없는 생명이 더 오래 산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

불행한 소리를 하는 가수가 불행해지고 행복한 소리를 하는 가수가 행복해진다지 않던가. 긍정적인 생각으로 탄생하는 아름다운 소리를 몸뚱이가 따라다니는 것은 아닐까? 몸뚱이를 지배하는 소리의 수명은 언제까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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