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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마음이 펴졌다

채미자, 하나씩 내려놓으며 산다 산문집중 2013년

by 채미자

그리움도 익어가는 가을이다. 오늘 모임은 양구회(아들이 양정고 1학년 9분일 때 만난 어머니들의 모임)와 농협주부산악회가 겹쳤다. 매달 만나도 두곳 다 가고 싶다. 그렇지만 단풍이 절정인 가을산은 지금 못가면 1년을 기다려야 갈 수 있기 때문에 산악회로 가기로 했다.

밤잠도 설치고 새벽부터 서둘러 밥해놓고 보니 6시 30분이다. 관광버스 출발시간이 아닌가. 허둥지둥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그런데 주차장이 텅 비어있었다. 허탈했다. 십분 정도는 기다려 주리라 기대를 했었는데 저들만 가버렸다. 정시에 출발하는 줄 알면서도 원망하는 자신이 한심스럽다. 휑한 공간에 어떤 눈들이 비웃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왔다.

집엔 아무도 없다. 최근에 산자락 외딴집으로 이주해서 수다 떨 이웃도 없다. 방에 처박혀 있을 수 밖에... 오늘따라 아늑하던 방이 답답하고 벽이 나를 조여서 견딜 수가 없다. 밖으로 뛰쳐나가서 무작정 걸어볼까? 순간 벽에 붙은 액자가 눈에 띄었다. 지금은 졸업하고 결혼했지만, 미대 재학중이던 조카딸이 첫 솜씨로 우물을 정성껏 그려 액자에 넣어 준 것이다. 서툰 솜씨지만 그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조카의 발랄한 모습이 떠오른다. 반짝거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고모!"하고 부를 것만 같다. 그 어떤 값비싼 그림보다 귀한 그림이다. 우울할 때도 그 그림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곤 한다.

'그래 우물에 내포된 의미로 아쉬운 마음을 달래보자'고 마음을 다독였다. 노트를 펴고 볼펜을 들었다. 무엇부터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겠다. 눈을 감았지만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다. 벌떡 일어나서 왔다 갔다 머리를 헝클다가 쓰다듬기도 하며 안절부절 못하는 시선이 책장에서 멈췄다.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 라는 책 제목이 반짝거렸다. 책을 끌어안았다. 한때 베스트셀러였던 이 책이 나의 구겨진 하루를 다림질해 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사소한 일로 얽매이지 말라는 내용으로, 언젠가 한번 읽었던 책이다. 우리는 정말 일상생활에서 사소한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산다. 무심코 한 말에 의미부여를 해가며 따지고 든다든가, 작은 실수에도 큰일이나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든가 매사 과민 반응을 하며 사는 것이 사실이다.

읽을수록 새롭게 공감이 간다. 반성하며 자책하며 읽었다. 한참을 읽었더니 마음이 후련하고 몸도 가벼웠다.

잠시 책을 덮고 마음으로나마 보고 싶은 가을 산의 등산객들을 만나러 갔다. 대둔산 등성이를 오르는 그들의 감탄이 들린다. 이 가을, 마음도 단풍든 저들의 옷차림새도 울긋불긋하다. 나무들의 질감이나 단풍잎의 모양도 제각각 아름답듯이 이들도 다르지 않다. 낙엽인지 사람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하나로 동화된 자연이다.

방향을 바꾸었다. 자모들이 커피숍 전망 좋은 의자에 앉아 수다떤다. '여자 셋이 모이면 선반 위에 접시가 엎치락뒤치락한다'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시끌벅적하다. 실속 없이 사뭇 떠들어대는 친구, 코믹한 말로 폭소를 자아내는 친구, 모임의 막낸데도 얌전하게 앉아서 할 말만 또박또박하는 큰언니같은 친구, 인내하고 수다를 다 들어주며 챙겨주는 어머니같은 친구도 있다. 그들 역시 개성어린 단풍이요. 화려한 가을산이었다. 대자연이었다. 상상으로나마 동지들을 다 만났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지 말자라는 책이 배부르게 해준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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