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학생들에게 읽고 쓰며, 설득력 있는 에세이 쓰는 법을 알게 한다. 내 삶의 교육 목표이기도 하고 선생으로서 학생들에게 가장 주고 싶은 것들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한 평생 내 생각을 담는 그릇을 키우는 일, 언어의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삶. - 이민호(J LIFE SCHOOL) 글 중
원 출처를 찾아보았다. 맥락을 볼 때 위에 문구만 이야기한 것은 아니고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진 않아 보인다. 그래도 위 문구 하나만이라도 구현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라면 괜찮단 생각을 했다.
읽는 법을 가르치는 건 참 중요하다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문맹률은 극히 낮지만 역설적으로 실질 문맹률이 높다고 한다. 글을 읽을 순 있는데 읽을 수는 없다. 다시 말해 글자를 읽을 순 있는데 내용과 행간을 파악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왜 문해력이 떨어지게 된걸까.
SNS에 여파 등으로 이제 사람들은 글을 읽을 때 F자로 읽는다고 한다. 눈에 보이는 정보만 가져가는 형태로 글을 읽는 것이다. 아주 간단한 내용이어야 하며 바로 정답만 말해줘야 읽는다. 그런 점에서 '브런치'라는 플랫폼은 굉장히 신선하다 생각하고 있다. 읽으려고 오는 사람들이란 점에서. 그 대척점에 있는 것이 대다수의 네이버 블로그 포스팅, 페이스북과 트위터, 허핑턴 포스트, 인사이트류라고 부르는 극도로 요약된 정보들.
동시에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다고 한다. 한국 독서량은 성인 기준 한 달 0.8 권이라고 한다. 1년에 10권 정도 읽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일 년에 100권을 읽고 어떤 사람은 안 읽는 가운데 평균이 10권인 것이다. 그 자료도 엄밀히 살펴볼 부분이 있겠지만 표면에 드러난 것만 보고 이야기해도 책 읽기는 굉장히 마이너 한 행위임을 볼 수 있다. 대부분 자기소개를 할 때 으레 등장하는 취미가 독서란 점은 흥미롭다.
모두가 스마트폰을 보면서 무언가 읽고 있지만 읽어내진 못하는 사회가 되는 중이다. 읽을 줄 아는 능력은 정보를 받아들일 힘이 있다는 것이며 동시에 내 생각을 키울 수 있단 것이다.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정찰'과 '군사'(에 포함된 요소는 여럿이 있다)이다. 상대가 뭘 하는지 알아야 하고 내가 그에 맞춰 더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고 내가 어떻게 움직일지 아는 것은 주체적인 삶을 위해 필요한 능력이다.
읽기는 듣고 이해하여 반응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키워야 하는 읽기 능력은 크게 두 가지다. 저자가 말하는 바를 이해해 내게 소화시키기, 저자와 읽은 내용을 갖고 토론하기이다. 책 읽기는 저자와 특정 주제를 갖고 대화하는 것과 비슷하다. 상대가 무슨 말을 했는지 들을 수 있어야 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그에 대해 내 생각을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
상대가 무슨 말 했는지를 못 알아들으면 애초에 대화는 되지 않는다. 영어 단어를 몰라도 영어 자막을 보며 들으면 들을 수 있다. 그런데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면 대화가 되지 않는다(말하는 능력 여부는 뺀다 해도).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읽는 것 또한 그렇다. 읽어서 무슨 말인지 아는 게 먼저다. 책에 따라 이해도는 다를 수 있다. 다를 수 있지만 없으면 안 된다. 힘든 책은 더듬더듬이라도 이해하려고 훈련 해야 한다. 그 더듬어갈 힘은 이해하기 수월한 책과 조금 어려운 책들을 읽어가면서 쌓아야 한다.
쓰기는 내 머리에 있는 것을 풀어내는 능력이다
이제 읽은 것이 있다면 쓸 수 있어야 한다. 대화할 때 들었다면 대답해야 하듯, 특정 주제에 대한 저자의 의견을 들으면 공감도 해주고 동의도 하면서 질문도 하고 반론도 펼쳐야 한다. 내 입장은 이렇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아마도 그 부분을 키워주는 탁월한 방법의 하나는 '서평 쓰기'일 것이다. 서평은 책 전체의 내용을 조망한 후 저자의 입장을 정리한 후 자신의 의견과 책에 대해 총평을 하는 것이다. 책 전체를 통해 저자의 생각은 그런데 내 생각은 이렇다는 걸 글로 쓰는 것이다. '느낌'을 쓰면 독후감이 되는 것이고.
일상 대화를 할 때 매번 '정리된 생각'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대부분 그때 든 '느낌'과 가벼운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하지만 특정 주제를 이야기할 때 매번 '느낌'을 이야기하면 특정 주제로 대화하는 거라고 보긴 어렵다. 토론 때 상대 의견에 자기 생각이 정리된 '입장'을 이야기해야지 듣고 난 '느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듯.
이제 써야 하는데 그냥 제 생각은 이래요, 하면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다. 말하기든 쓰기든 상대가 흥미를 끌어야 들어주고 읽어준다. 상대해줄 이가 있어야 존재 의의가 있다. 여기서 '설득력'이란 표현에 내 생각은 그렇다.
설득은 상대를 굴복시키는 게 아니라 내 이야기를 듣게 하는 힘이다
내가 어떤 첨예한 주제에 대해 글을 쓴다고 하자. 그때 내가 아무리 글을 잘 써도 반대 입장인 사람이 보면 설득되기는커녕 내가 쓴 글 하나하나에 조목조목 반박하려 할 것이다. 내가 설령 그의 반대를 모두 논파시킨다 해도 그는 의견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나와 다른 뚜렷한 의견이 있는 사람의 생각 바꾸기가 쉽지 않다는 건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정치나 종교, 이익이 걸린 일들, 때론 사소한 것들까지도.
설득력 있다는 것은 반대 입장인 상대에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그럴 만하네' 란 생각이 들게 하는 것까지다. 나와 정반대인 의견이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법하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보통 반대 의견을 말하면 그에 대해 생각할 가치도 없고, 재고의 여지도 없다 여기기 쉽기 때문이다. 상대는 너무 식견이 좁고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른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때 설득력이 있다면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까지 생각게 할 수 있다. 그러면 대화할 수 있다. 서로의 진지하게 의견을 들어볼 수 있다. 조율의 시도도 이전보다 건설적으로 할 수 있다. 둘 다 그럴 만하다는 걸 이해할 수 있으니깐.
내 생각을 상대가 들을 만하게 말하는 것, 그럴 만하다고 생각하게 쓰는 것은 건설적인 대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가 대부분 건설적인 토론을 하자고 시작하면 파괴적인 논쟁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로에게 서로가 설득력이 없다는 것(물론 애초에 상대 말을 들을 넉넉함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항상 나와 같은 의견인 곳은 없다. 다 다르다. 서로의 생각을 들을 만한 글을 쓰며 말을 하는 사회가 된다면 어떨까. 그런 사회를 꿈꾸며 하버드는 목표를 잡은 것이 아닐까. 대학이 그런 생각을 한단 자체가 부럽단 생각을 한다.
송나라의 문인 구양수는 글을 잘 쓰려면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想量)’ 을 하라고 한다. 양에서 질이 나온다는 것이다. 동의한다. 그래서 나는 매일 읽고 매일 쓰며 생각한다. 나아질 것이다.
내가 요즘 매일 가는 곳에선 그런 동기 부여를 해준다. 처음 글에 인사이트를 준 분이 그 곳의 원장이다. 하버드 대학의 목표에 감동하여 그것을 실현하려고 했다. 그 목표가 현실이 되어 그곳에 가면 좋은 글을 읽고 싶게 하고 좋은 말과 글을 쓰고 싶게 한다. 좋은 마음과 좋은 힘을 전달받는다. 즐겁고 재밌는 곳이다. 그 덕에 오늘 글 하나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