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 다니는 학원엔 개강 초기에 같이 듣는 사람들끼리 조를 만든다. 조장을 뽑고 총무를 뽑고 역할을 정한다. 그리고 디파짓, 예치금을 걷는다. 2-3만 원 정도. 결석하면 5천 원, 지각하면 3천 원을 낸다. 걷힌 돈으로 월말 조별 회식을 한다.
처음엔 일종의 채찍으로 보이는 방식에 거부감이 들었다. 어떨 땐 3만 원을 내는 게 부담될 때도 있었다. 그런데 디파짓을 어쩌다 안 하게 된 적이 있다. 확실히 근태가 엉망이 되고 숙제를 어영부영하게 됨을 봤다. 모두 자원해서 오는 학원인데 왜 그렇게 된 걸까 궁금했다. 잘은 몰라도 우린 완전한 자유보다 적당한 긴장이 있어야 하나보다.
그러다 지각을 하게 된 날이 있다. 자꾸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게 한창 버거울 때였다. 학원 근처에 도착해선 정말 가기 싫단 생각이 들었다. 이 나이 돼서 지각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게다가 3천 원이 갑자기 진짜 3만 원이 된 것처럼 아까웠다. 그냥 안 가고 싶었다. 안 가면 5천 원지만 그런 생각은 못 하고 다시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다 이런 생각을 했다.
일찍 잤더라면,
일어나자마자 씻으러 갔다면
지각하지 않았다
아주 간단하고 당연한 사실인데 그게 크게 와 닿았다. 명강사의 열강 후 잠시 침묵이 있다가 의미심장하게 내뱉은 회심의 한 마디처럼. 그 한 마디가 화두처럼 되새김 되었다. 이 생각이 어디서 온 걸까? 3천 원이 아까워서 그냥 가기 싫었던 마음이 들 때였다. 다시 생각해보니 3천 원 차감이 없었다면 없었을 생각이었다.
결국 3천 원을 깎였지만 나는 꽤 또렷하고 분명한 정보를 내 삶에 새겼다. 부모님이 평생을 이야기해도 안 들리던, 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구현되지 않던 지식이었다. 그 지식이 내게 되었다. 단돈 3천 원으로.
살면서 일어난 모든 안 좋은 일을 이렇게 생각하긴 어렵다. 하지만 몇몇 안 좋은 일들은 관점을 바꾸면 의외로 내게 도움이 될 때가 있다. 지각한 건 객관적인 사실이다. 내가 늦게 자고, 바로 못 일어난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서 머물면 현실적일 순 있다. 그것이 만든 결과가 3천 원 차감이고 그래서 기분이 상했다는 것에 머물면 비관적이 될지 모른다. 하지만 관점을 바꿔서 내가 지각하고, 늦게 자고 못 일어난 이유를 배울 수 있다면, 차감된 3천 원을 벌금이 아니라 수강료라 생각하면 기분도, 삶도 달라질 수 있다.
나는 이게 낙관적인 태도라 생각한다. 같은 현실을 보다 건설적으로 해석하는 것. 부정적인 에너지도 이용할 줄 아는 것.
그 수강료를 통해 배운 정보로 나는 지금 새벽에 곧잘 일어나고 있다. 내일도 일찍 일어나야 한다. 이번 주를 돌아볼 때 내일도 쉬이 일어날 것이다. 3천원으로 얻은 정보로 일찍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이 됐다면 가성비가 괜찮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