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가는 지하철 안이었다. 꽉 찬 상태는 아니지만 여유 있게 움직일 수는 없을,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누군가 붙진 않아도 될 정도. 내 앞에 수화하시는 분들이 있었다. 상황상 핸드폰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책을 피기도 어려웠고. 그래서 그냥 두 분을 바라보게 됐다.
한 분이 먼저 수화로 이야기를 전하면 다른 분이 본 후 다시 답한다. 그 모습을 보면서 깨달은 게 있다. 상대방과 수화로 대화할 때는 상대방을 끊임없이 바라봐야 한다. 다른 데를 본다거나 다른 행동을 할 수 없다. 상대가 수화하면 바라봐야 한다.
수화는 농아인 분들이 말로 이야기하는 걸 대신하여 몸짓이나 손짓으로 표현하는 의사소통 수단이다. 일종의 언어이다. 수화란 끊임없이 바라봐야 하는 언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본질적으로 집중해야 하고 '경청'할 수밖에 없는 언어다(실제 수화를 사용하시는 분과 이야기해본 것이 아니라 수화를 소재로 이야기를 전하는 데 실수가 있을지 모르겠다. 혹시 실수가 있다면 바로 정정하겠다).
말을 하고 들을 수 있는 우린 어떤가. 상대방의 말을 들을 수 있다고, 자주 말하는 상대방을 안 쳐다보며 듣는다고 하지 않던가. 소리가 들리기에 들었다며 그냥 흘려듣지 않았던가. 카톡을 하고,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곳을 쳐다보면서도 상대방의 말을 듣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던가. 들리기에 들었다 말하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경청했다고 할 수 있을까.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였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우리는 대화 중 눈앞에 있는 상대방에 집중하지 않을 때가 있다. 상대를 바라보지 않고, 귀 기울이지 않으면서. 농아인 분들은 귀 기울여 들을 수 없을지라도 상대방의 표현에 눈을 기울인다. 동작 하나하나에 집중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으니깐. 무슨 마음인지 알 수 없으니깐.
들을 수 있으니 바라보지 않을 때가 있다면, 때론 상대의 말에 관심을 줄일 때가 있다면. 그 순간 어쩌면 우리에게 들을 수 있단 사실이 사치일지도 모르겠다. 다른 모든 능력들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이 며칠간만이라도 눈멀고 귀가 들리지 않는 경험을 한다면
그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축복할 것이다.
어둠은 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하고
침묵은 소리를 듣는 기쁨을 가르쳐 줄 것이다
헬렌 켈러
상대방의 말이 아닌 상대방을 듣고자 한다면 들을 수 있는 능력 이전에 들으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내리기 전까지 그분들을 바라봤다. 역에 멈출 때마다 둘 사이에 다른 사람들이 비집고 들어와 거리가 생겼음에도 그 둘의 시선은 서로를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한결같이 상대방을 바라보는 대화를 하는 모습이 내게 남아있다. 명확한 손짓으로 말하며 명징한 눈빛으로 서로에게 집중하며 대화하는 모습이 대화란 이런 것이라고 말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