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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민씨 Dec 30. 2015

<시카리오>를 보고,

'대국적', 그 단어의 폭력성에 대하여



<시카리오>는 건조하다. 담담히 참혹한 현실을 이야기하는 영화다. 


이 영화의 핵심 주제를 두 가지로 잡았다. '극적인 혹은 대국적 복수극', '최악과 차악의 선택'


극적인 복수극


첫 제압 씬에서 폭발 사고로 죽은 경찰 두 명의 원한을 위해서 여주인공 '케이트'는 상부의 자세히 알 수 없는 카르텔 관련 임무를 하기로 한다. 그 날 사건의 진짜 책임자를 잡을 수 있단 말에 자원했다. 그 대화 앞에 '극적인 복수극'이 이 진압 작전에 목적이라고 리더인 '맷 그레이버'가 말한다. '극적인 복수극'은 이 영화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같이 일하지만 종잡을 수 없던 알렌한드르가 어떤 존재인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케이트는 나중에야 듣게 된다. 그는 원래 있던 다른 카르텔의 사람이었다. 그러다 지금 카르텔에 의해 자기 아내와 딸이 무참히 살해되었고 복수하는 중이었다.


마약 운반을 하는 땅굴로 들어가 제압에 성공한다. 대신 운반해주던 경찰을 잡았고 그의 이름은 '실비오'다. 알렌한드르가 실비오를 잡았다. 실비오를 합법적으로 잡으려는 케이트가 제지하지만 도리어 제지당한다. 알렌한드르는 실비오를 데리고 가서 이용해 중간 보스를 잡아, 결국 기다리던 최고 보스를 만난다. 그의 자녀와 부인을 죽인 후 그도 죽이며 복수에 성공한다.


영화는 틈틈이 한 멕시칸 가정을 보여준다. 아들은 자는 아빠를 깨우며 축구 보러 와달라고 부탁한다. 처음엔 카르텔인가 했는데 경찰이다. 장면마다 아들은 축구하자고 말한다. 사소한 일상이 나온다. 아빠가 바로 마약 운반책이었다. 


대국적 복수극의 희생자


실비오는 알렌한드르에게 잡힌 후 그가 하라는 대로 하다가 중간보스를 잡는 과정에 그냥 '하찮게' 죽는다. 그의 죽음은 '대의'를 볼 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나온다. '대국적'으로 보면 대수롭지 않은 거라고. 그에겐 부인과 아들이 있다. 둘은 총격이 매일 일어나는 후아레즈에 남겨진다. 마약 운반책인 그가 잘했다는 건 아니다. 그저 한 사람의 생명이, 한 가장이 다른 사람의 복수를 하기 위한 과정의 한 부분으로 취급된다는 게 씁쓸함을 주었다.


내 복수를 위해 다른 엄한 누군가를 죽일 권한은 없다. 개인적 차원을 넘어 국가적인 문제로 가도 마찬가지. 하지만 <시카리오> 속 후아레즈에서는 누군가 죽는다는 건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냥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엄청난 참상이지만 적나라하게 묘사하여 도리어 담담함에서 섬뜩함과 먹먹함을 느끼게 한다.


미국은 지금 카르텔을 없애고 예전 카르텔의 복귀를 돕는다. 예전 카르텔을 지지하는 이유는 하나다. '질서'. 어떤 수를 써도 마약 하는 사람을 막을 순 없다. 마약 하는 사람이 있으면 마약의 수요가 있으니 당연히 만들게 된다. 이 또한 막을 수 없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카르텔'은 자연히 생긴다. 미국이 택한 입장은 자기들이 통제할 수 있는 카르텔을 바란 것이다. 지금 카르텔은 통제 불능이니 제압하려 한 것이고. 그 '대국적 질서'를 위해 생긴 작은 희생들은 아무 문제 삼지 않는다.


알렌한드르는 '극적인 복수극'을 위해서, 맷은 그런 알렌한드를 이용해 '대국적 질서'를 위해서 서로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움직인다. 그 둘의 목적을 위해 '케이트'는 끝까지 이용만 당한다. 모든 불법적인 것을 덮어줄 '합법적 절차'를 위해서. 케이트는 그 상황을 보면서 다른 대안이 없음을 본다. 최악과 차악 중 차악을 골라야 한다. 그나마 나은 차악도 최악과 다를 게 없다. 그렇지만 고를 시간이 없고 골라야 한다. 고르지 않으면 죽고, 무엇을 골라도 구정물이 묻는다. 결국 케이트도 차악을 선택한다.


최악과 차악의 정의


최선은 마약을 없애는 것이지만 불가능하다. 미국이 선택한 차선은 통제 가능한 카르텔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지금 카르텔을 없애는 것. 케이트에게 최악은 불법적인 진행이었다. 하지만 후아레즈에서 최악을 피하려면 죽을 수밖에 없다. 후아레즈는 법이 통하지 않으니깐. 바로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 있으니까. 이곳의 현실을 그저 받아들이기엔 케이트는 순진했다.


케이트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으면 그만두겠다고 말하며 임무가 어떤 건지 알아낸다. 그리고 자신들이 왜 불려 왔는지 듣는다. 그건 재밌게도 '합법적'인 절차를 위해서였다. 미국인 요원이 임무에 포함되어야 하기에 데려온 것이라고. 애초에 여기서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건 없다. 합법적인 절차는 죽음을 의미한다. 케이트는 이 어이없는 상황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아본다. 자기 상관보다 위에서 진행되는 일임을 알게 된다. 합법적이지만 동시에 초(超) 법적인 일이 진행되는 것이다. 대국적 정의를 위해서.


케이트는  돈세탁하는 여자를 잡게 되고, 케이트는 은행에 들어간다. 합법적으로 절차 진행을 위해. 맷은 막지만 듣지 않는다. 그 덕에 케이트는 조직에게 찍혀 걸린다. 그녀에게 접근할 경찰이 바로 포섭되어 작업에 들어간다. 죽을 뻔한 상황에 부닥쳤지만 맷과 알렌한드르 도움에 산다. 


이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곧바로 접근해올 거라는 걸. 케이트 입장에선 이용당한 거지만 맷 입장에선 말을 안 들은 케이트가 자초한 일이었고 그 상태에서 대안을 찾은 것이다. 그녀 또한 대국 위에  말일뿐이다. 그녀가 악을 제거하기 위해서 악이 되어야 한다. 제거할 악의 크기가 커지고 농도가 짙어질수록  더욱더. 그녀는 악이 되기를 거부하고 끝까지 자신의 순진한 순수함을 지키려 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다.


애초에 그녀는 '합법적 절차'를 위해 이용된 말이었다. 그녀의 사인으로 지금까지 이뤄진 모든 불법이 합법이 된다. 사인을 거부한 그녀에게 총구가 겨눠진다. 이제 그녀에게 최악은 자신의 정의를 지키려다 죽는 것이다. 차악은 한 번의 사인을 하고 사는 것이고. 바라지 않았지만 죽음의 공포에 굴복한다. 


모든 대국적 정의는 '어쩔 수 없다'는 명분으로 가는 길에 모든 걸 짓밟으며 진행된다.



지극히 현실적인 그래서 더 비참한



'차선'과 '차악'은 구분하기 어렵다. 무엇이 정의이고 불의인가. 이론적인 이야기가 현실에선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보여준다. 현실에 나타난 악을 제거하기 위해선 나 또한 그 더러움이 묻을 수밖에 없다. 그 악이 커질수록 나 또한 악에 뒤덮인다. 끝에 가선 누가 악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그나마 사람들이 덜 죽는 상황을 위해 예전 카르텔을 지지하는 미국의 생각은 단순하지 않다. 어떤 입장을 쉽게 지지할 수 없지만 그 생각을 무시할 수 없다. 누군가는 어떤 선택을 반드시 해야 한다. 누군가는 모든 게 최악으로 보이는 선택지에서 '차악'을 골라내야 한다. 모든 게 악이기에 어떤 선택을 해도 악이 묻는다. 그래도 누군가가 실행해야 한다.


'대국적', 그 단어의 폭력성에 대하여


이 영화는 씁쓸하다. 우리가 잘 알 수 없는 곳의 이야기지만 보면 이해할 수 있게 담겨있다. 얼마나 실감 나게 담았는지 영화 후에 어쩔 도리가 없는 후아레즈 현실의 갑갑함에 스트레스를 꽤 받았다. 영화는 어떤 답을 주거나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저 현실을 보여줄 뿐이다. 최근 '대국적' 사과로 시끄럽다. 정치인들의 무언가를 위해 정작 사과받을 당사자인 할머니들의 심정은 하나도 고려되지 않는다. 할머니들 또한 정치인들의 대국적 놀이의 말로 전락해버리고 말 것일까. 멕시코나 우리나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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