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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민씨 Jan 04. 2016

충고를 들을 마음과 고칠 용기

도구의 도움 없이 누구나 자기 혼자선 얼굴과 뒷모습을 볼 수 없다. 내 흉도 내가 볼 수 없다. 내 단점을 나만 모른다. 남의 단점은 정말 깨알같이 파악할 수 있는 사람도 대개 자기 단점은 모른다. 막연히 그냥 있다 보면, 자신은 단점 없는 사람,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사람으로 착각하기 쉽다. 


음식을 다 먹으면 거울을 보면서 이를 확인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이 고춧가루를 낀 채 하루를 보낼 가능성은 적다. 이런 이들도 거울이 없거나 자신을 볼 방법이 없다면 아마 못 뺀 고춧가루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 말해주는 게 유일한 방법일 테다.


자신의 단점을 알려면 누군가 말해줘야 안다. 말해줄 수 있는 이가 있단 건 좋은 신호다. 나를 생각하는 마음에 나의 단점을 말해줄 이가 있다면 그건 인복이다. 이런 인복을 사람에 따라 받기도 하고, 차기도 한다.


누군가 이에 고춧가루가 꼈을 때 말해주면 반응이 크게 둘로 나뉜다. 고마워하며 빼는 이와 그런 걸 지적하느냐며 성내는 이가 있다. 이런 모습은 단점을 이야기하거나 개선점을 이야기해줄 때에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들으면 바로 다듬으려고 하는 이와 비꼬거나 성내는 이로 나뉜다. 


말하면 듣거나, 듣지도 않거나


영화를 볼 때 필요한 예의가 있다. 조용히 관람하는 게 그중 하나다. 유독 성량 조절을 안 하고 떠드는 사람이 있을 때가 있다. 주위에서 살짝 눈짓으로 눈치를 주거나 조용히 말하면 괜한 면박을 준 것처럼 기분 나쁘단 표정으로 때로는 어깨도 으쓱하며 마지못해 조용하거나 그것도 무시하고 계속 떠들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눈짓 한 번에도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바로 조용히 하려 한다. 짧은 순간의 일이지만 됨됨이가 느껴진다.


어떤 이가 알려주어도 계속 같은 우를 범하길래 다시 말을 했다. 돌아온 건 빈정거리는 태도였다. 그이 같은 경우는 앞에선 모르는 척 웃음으로 넘어가지만, 항상 뒤에서 말하는 '본심'은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뭘 그리 이야기 하나', '짜증 나게' 등이다. 처음엔 하하 호호 잘 웃어서 대부분 성격 좋은 줄로 알았다. 그런데 조금 지내보니 말하는 내용이나 태도를 볼 때 실제 성향이 전혀 아니란 걸 다들 알았다. 본인만 모른다. 그이 자신에게 한 평을 들으면 '착하고, 잘 웃으며, 사람을 잘 챙겨준다'이다. 밖에서 보는 모습과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 모습의 차이가 '다른 사람' 수준이다.


고집은 필요할 때만 부려야 한다


말해주어도 듣지도 않고 고치지도 않는 상황이 반복되면 위에 말한 사람처럼 될 가능성이 크다. 위 사람도 다른 이의 조언을 비꼬아 듣고, 비웃으며 무시한 것이  계속되어 지금처럼 되었을 것이다. 전혀 자신의 단점과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며 살아온 것이다. 자신은 괜찮다고 자부하지만 이엔 고춧가루와 각종 음식물이 가득 끼었을 확률이 높다. 아무리 다른 부분을 잘 꾸몄다 해도 입을 여는 순간 모든 게 깨질 것이다. 아무리 잘나도 '인격'이 엉망이면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다. 설령 실력은 인정해줘도 존경하진 않는다.


우린 누구나 실수를 한다. 우리가 매일 밥을 먹고, 우리 이에 무언가 항상 끼듯이. 계속 신경 쓰고 돌아봐야 한다. 하지만 매번 거울이 있는 게 아니다. 누군가가 말해주어야만 알 때가 더 많다. 들을 땐 무안하고 민망해도 말해준 것에 고마워해야 한다. 다른 데에서 추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게 준비할 수 있음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한다. 거기에 대고 도리어 그런 말을 하느냐고 성을 내고 심지어 말해준 걸 전혀 고치지 않기로 한 이에겐 사실 희망이 거의 없다. 


민망해도, 듣긴 해야 한다


항상 타인의 말에 휘둘리며 살 수 없다. 동시에 타인의 '도움'을 계속 거부해서도 안 된다. 계속 고집을 부린다면 정말 내가 개선할 부분을 계속 놓칠 수 있다. 설사 그저 마음에 안 들어서 하는 말이라 해도 맞는 말이라면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내가 잘못한 부분, 실수한 부분이라면 겸허히, 겸손하게 듣고 인정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 부분을 지적받을 때 발가벗겨진 채로 강단에 서듯 민망하다. 익숙해질 수 없는 기분이다. 그래도, 그래도 그 감정을 두려워해서 듣는 걸 포기해선 안 된다. 


나 또한 많은 실수를 자주 한다. 자주 이야기를 듣는다. 다행히도 아직은 그런 따끔한 소리가 두려워 귀를 닫으려 하진 않는다. 종종 따끔한 소리를 굳이 사서 들으려고도 한다. 아주 조금씩이지만 나아질 거란 희망을 걸어본다. 물론 그런 소리 들을 일을 줄이는 게 더 중요하겠지만. 글을 쓴 나에게도 이 글이 족쇄가 될지 모른다. 누군가의 말에도 계속 나아지지 않고 있는 게 있을 것이니.


들을 용기와 고칠 용기가 있다면


그래도 혹시 누군가 자신에게 타당한 쓴소리를 한다면, 진지하게 들어보자. 내가 안 좋아하는 사람이라 해도, 맞는 말을 할 수도 있으니 그중 고칠 것은 고치고 지킬 것은 지키면 된다. 중요한 건 들을 용기와 고칠 용기다. 일단 염두에 둔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가 크니, 먼저 염두에 둬보자. '말해도 안 들을 사람'보단 '그래도 노력해보는 사람'이 낫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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