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봤다. 다만 꽤 오랫동안 이 영화를 보고 싶어 했던 게 기억난다. 제목, 포스터 색감, 주인공의 눈빛이 끌렸다. 언제일진 모르지만 꼭 볼 거란 다짐을 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는 색감에만 끌린 것이었으니 보다 더 끌린 것이겠다.
미래 사랑에 대한 이야기, 뻔한 소재다.
그런데 주제를 바꾸고 표현을 바꾸어 질문하니 달라진다.
영화를 보며 많은 고민을 했다. 영화의 주제에 계속 생각하면서 어떻게 답을 낼 것인지 궁금해했다. 답을 친절하게 내주진 않는다.
주인공인 '시어도어'와 OS인 '사만다'가 만나서 친해지고 가까워지고 사랑에 빠지며 갈등을 겪는 과정 내내 질문을 던진다. 영화가 던지는 첫 질문은 'OS는 인격이라 볼 수 있는가?'이다. 이 질문에 답을 생각해보기도 전에 굉장히 빠르게 인격을 흡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럴 수도 있겠다'를 영상으로 설득시킨다. 그러면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간다. 'OS(운영체제)와 사랑에 빠지는 것은 가능한가?'이다. 가능하다고 답을 또 보여준다. 그리고 'OS와 연인처럼 연애할 수 있는가?'에도 이런 방식이 있다고 보여준다. 처음엔 OS와 사랑에 빠진다는 걸 잘 이해 못 했는데 갈수록 설득당한다.
그 둘의 사랑을 보면서 점점 질문은 깊어진다. '사랑은 무엇이며 사랑을 구성하는 건 무엇인가', '사랑이 되게 하는 것, 사랑을 깨는 것은 무엇인가', '둘을 정말 이을 것인가? 어떻게?'
'진짜' 사랑은 뭐지? 결혼은?
시어도어는 영화 시작부터 별거 중인 아내 캐서린을 꿈에서 그리워한다. 그는 사랑을 갈구하면서 동시에 전화로 성적 관계를 즐긴다. 그에게 나타나는 특성은 '청각적'인 요소다. 그에게 사랑은 '육체적'인 부분은 나중이다. 소개팅으로 만나 잘 통한 여자가 육체적 관계를 이야기하자 혼란스러워하며 멀어진다. 당장에 그에게 사랑은 그 부분이 아니니깐. 그는 이해받길 구한다. 대화가 잘 통하는 걸 바란다. 더 나아가 그 자신의 모든 걸 이해해줄 이상적인 대상을 찾는다. 그에게 사만다만이 그가 찾던 이상적인 존재로 느껴진다.
하지만 그가 말했듯 연애에서 '허니문 단계'는 금방 지나간다. 영화는 유독 실제 연애보다 짧아 보이게 묘사한다. 이들 사랑의 불완전성을 나타낸다. '청각'에만 의존한 사랑이기에 무언가 삐거덕한다는 걸. 분명 시어도어에게 청각, 대화, 이해가 중요한 요소여도 그게 그가 바라는 사랑의 전부는 아니기에.
시어도어는 바라는 것이 분명하면서도 그가 바라는 다른 건 인식하지 못한다. 그는 전적인 사랑을 갈구한다. 결혼을 그리워한다. 그에게 결혼은 "다른 사람과 삶을 함께한다는 것,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성장하는 것, 서로를 겁먹게 하지 않으면서 변화하고 삶을 공유하는 것"이다.
'삶'을 공유한다는 건 전인격적인 이야기다. 오감과 지성과 감성과 의지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해야 한다. 사만사는 청각적인 존재다. 시어도어가 사랑에 빠질 순 있지만 삶을 공유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도 많다. 카메라를 통해 보고 무언가 함께 할 수 있지만 결여된 요소가 계속 느껴진다. 그 결여에 회의감이 들어온다. 이게 정말 사랑일까에 대한.
사만사가 '이사벨라'를 매개로 육체적 사랑을 시도해보려 하지만 실패한다. OS가 육체적 관계를 갖는다는 건 본질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시어도어는 듣는다는 것, 한 인격으로 이해받길 바라는 것을 구한다. 하지만 그가 바라는 '결혼' 생활에는 보는 것, 만지는 것, 소유하는 것, 함께 성장하고 부딪히고 이해하고 용인하며 나아가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사만사는 아예 그와 다른 '종'이다.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으며 소유하고 있지만 전적인 소유가 아니다. 성장도 다른 방식과 속도로 한다.
다른 존재라는 부분을 이해하는데 시어도어는 버거워한다. 결정적으로 그가 흔들리는 계기가 생긴다. 시어도어는 다른 OS인 '앨런 와츠'와의 대화에 질투한다. 그는 OS이기에 시어도어보다 훨씬 지적으로 뛰어나다. 사만사가 시어도어가 다른 여자와의 만남에 질투하듯 다른 '남자'와 대화한 것에 그 또한 질투를 느낀다. 그러나 그가 정말 화가 난 부분은 다른 데에 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은 '소통'이다. 그런데 사만사와 모든 것을 소통할 수 있는 건 '비언어적'인 방식으로 더 깊고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는 앨런 와츠였다. 자기보다 사만사와 더 깊은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 그를 화나게 했다. 앨런 와츠와 사만사가 사랑에 빠지진 않았지만 그 가능성이 보인 것이다. 자기가 넘볼 수 없는 다른 존재 간의 대화에. 우리도 이런 부분을 쉽게 본다. 내 연인이 내가 모르는 전문 분야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이성과 그 이야기를 할 때를 생각해보자. 그때 자기에겐 보여준 적 없던 진지하고 진솔하며 생기 넘치게 푹 빠진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대화한다면 우리도 이상한 감정을 조금은 느낄 것이다.
서로 독점하지 않는 사랑은 가능한가?
결정타로 사만사는 동시에 자신은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한다. 사만사는 시어도어와 이야기하는 동시에 수천 명과 이야기하며 수백 명을 사랑하고 있다. 여기서 나타난 사랑의 본질적 요소를 보게 된다. 사랑의 '독점성'이다.
'청각'적 요소로만 만나야 하는 것, 자기보다 잘 통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까지 시어도어는 흔들리지만 참는다. 하지만 '독점'이 아니란 이야기엔 무너진다. 삶을 공유하는 존재는 1명이어야 했다. 결혼은 일종의 독점적 헌신을 서약하는 것이니. 사만사는 동시에 여럿을 사랑하지만 그것이 시어도어에 대한 사랑에 영향을 주는 게 아니라고 한다. 사만사에겐 가능할지 몰라도 우리로선 관념적으로만 생각해볼 수 있는 부분이다.
영화는 결국 사람이 OS와 사랑에 빠지며 일정 부분 사랑의 한 부분을 구현할 수 있지만 사랑의 지속과 '결혼'을 할 수 있는 가에는 회의감을 보여준다. 동시에 사시어도어가 느낀 감정 자체가 진짜이기에 계속 '사랑'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사만사와의 짧고 굵은 만남을 통해 시어도어도 자신의 사랑을 돌아본다. 한층 성숙해진 그가 되자마자 영화가 끝나면서 여운을 준다.
사랑스러움을 그대로 담아내는 영상
영화의 촬영 구성은 시어도어의 감정에 따라 색상을 표현한다. 기분 좋을 때와 우울할 때를 바로 알 수 있게. 대체로 감각적인 색감을 사용하며 종종 강렬히 대비되는 색을 쓰는데 그 자체로도 볼 만하다 싶다. 여러 앵글을 통해 사만사와 사랑에 빠진 시어도어를 표현한다. 침대에 있을 때, 시장에서 음성으로 데이트할 때, 방에서 카메라 앞에서 춤을 출 때.
개인적으로 영화 her에서 시어도어가 아내 캐서린이 사랑했을 때 표현은 백미라고 생각한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우리가 과거에 사랑을 떠올릴 때 얼마나 아름답게 생각하는지를 그 미를 그대로 담아냈다.
사만사가 종종 즉석에서 만들어주던 배경 음악들 특히 피아노 음악은 놀랍다. 인공지능이 그렇게 뚝딱 그토록 감정적인 음악을 만들어낸다니.
미래, 로봇 혹은 OS와의 사랑. 어쩌면 뻔한 소재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현실감 있게 담아냈을 때 정말 실제 있을 법해질 때 우린 보다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서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인간다움은 무엇이며 인간으로서 사랑하는 건 무엇인지. 사랑은 무엇인지.
일반 사랑 영화로 봐도 충분히 볼 수 있을 영화다. 동시에 소재를 건져낸다면 한없이 깊게 볼 수도 있을 영화다. 영화는 시종일관 질문을 던졌고, 영화가 끝난 후 내겐 진짜 사랑이 무어냐는 질문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