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에서 이제 SNS는 빼놓을 수 없다. 접촉점과 양이 많아지면서 말과 탈도 많아진다. 그중 제기되는 불평은 가공된 행복만 올린다는 것이다. 행복해 보인다는, 과시가 가득해 보기 불편하다는 것. 최근 들은 스피치 수업에서 이런 화두가 던져졌다.
'내가 타인의 글을 보며 열등감을 느낄 수 있듯, 타인도 내 글을 보고 느낄 수 있다면 자중하는 게 옳은가?'
분명 SNS에는 정제된 순간만 올라온다. 일종의 '순간을 나누는 시스템'(SNS)인 것이다. 거기에 어떤 것을 올려야 할까? 다양한 방식이 있다. 글과 사진, 영상이 주를 이룬다. 방식만큼 내용도 다양하기에 고민할 수 있다. 등산의 미학은 등반에 있지만 사진은 정상에서 찍은 것만 주로 올라간다. 올라간 사람에겐 마지막 정상은 '절정', '환희'가 터져 나오는 한 부분이지 전체가 아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를 찍는 게 아닌 이상 그 힘든 과정 전부를 올릴 수는 없다. 심지어 다큐멘터리 조차도 의도대로 가공한다.
비교, 열등감, 해석력
결국 화두가 제기하는 것의 의식에는 '비교'가 있다. 우린 비교하지 않을 수 있는가?로 흘러갔다.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달라 보이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이 '비교'다. 중요한 건 '다름'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다. SNS는 이제 현대 사회를 살면서 뗄 수 없는 요소이다. 사회적 관계를 위해 어느 정도 향유해야 하는 모종의 사회적 의무가 있다. 그럴수록 봐야 할 소식들은 쌓여 간다. 그래서 더욱 해석력이 중요하다.
누군가는 나보다 잘살기도 하고, 비슷하기도 하며 못 살기도 한다. '다른 현실'은 엄연히 눈에 보이는 차이다. 나보다 잘난 사람을 보며, 나는 왜 저렇게 못 살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의 해석이다. 같은 현상을 보고도 자족하고 감사하며 낙관적인 선의로 해석할 수도 있다. 혹은 '그렇구나' 정도로 넘어갈 수 있다. 모든 '찰나'가 올려진 것처럼 빛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해석에 따라 '열등의식'으로까지 이어지게 안 할 수도 있다.
비교하여 열등감을 느끼기보다 좋은 일을 보면 축하를 해주고 슬픈 일을 보면 위로를 해줄 수 있다. 선의로 해석하여 행동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석이 어렵다면 그런 소식들을 피하는 게 내 쪽에서 할 수 있는 일 아닐까?
자신의 마음을 바꾸는 것은 할 수 있는 일이며, 타인의 마음을 바꾸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이다. 할 수 있는 일에 힘을 쓰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며, 할 수 없는 일에 신경 쓰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 철학자 에픽테토스
<치유의 독서> 중
선의로 해석하는 데에 <관점을 디자인하라>의 저자인 관점 디자이너 박용후 씨 이야기가 생각났다. 한 술집 앞에 꽃을 파는 할머니의 손녀딸이 아프단 딱한 사정을 듣고 원래 가격보다 더 비싸게 꽃을 산 남자가 있다. 그 꽃을 들고 술집에 들어가 친구를 만나니 그 할머니가 거짓말을 한 거라고 손녀딸은 없다고 이야기했다. 남자는 억울하다거나 화를 내기는커녕 표정이 밝아졌다. '할머니 손녀딸이 안 아프구나, 정말 다행이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물론 모든 상황에 다 적용할 수는 없는 해석이지만 나타난 현실 자체를 낙관적으로 해석하는 모습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같이 수능 공부를 했던 친구가 서울대 간 것을 보고 자신과 비교하며 열등감에 빠질 수도 있다. 또는 그 친구와 자신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돌아보고 나아질 점을 찾아볼 수도 있다. 간 데엔 갈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깐.
근면 성실하여 일도 꼼꼼히 잘하고 부지런히 일찍 나오는 친구를 보며 지각하는 자신을 돌아볼 때 '쟤는 타고난 거지, 쉽게 일어날 수 있으니깐 그렇지'로 생각할 수도 있다. 또 동시에 나는 잠이 많은데 지각하지 않고 성실하려면 어떻게 해볼 수 있을지 생각해볼 기회로 여길 수 있다.
상대가 올리는 데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해석뿐이다. 그 친구의 글을 일부러 팔로잉을 끊어 안 보거나, 차단하지 않고선 볼 수밖에 없다. 내 마음을 바꾸는 것은 할 수 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소신껏 동시에 배려를
동시에 올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상대가 내가 맛있게 먹은 음식이나 즐겁게 다녀온 여행지를 보고 질투심을 느낄 수 있으니 올리지 말아야 할까? 그 부분은 각자 선택의 부분이다. 한 가지 우화가 생각났다. '나귀 메고 가는 아버지와 아들'이야기였다.
그냥 둘 다 걸어가거나, 아들이 나귀를 타고 가거나, 아버지가 타고 가거나 할 때마다 사람들은 뭐라고 한다. 결국 그냥 둘이 나귀를 들고 간다. 아마 그래도 또 뭐라고 할 사람이 있을 거다. 모두의 기준을 다 충족시킬 수 없다. 중요한 건 자기 마음이다.
내가 올리고 싶은 것을 올리면 된다. 소신껏 하자. 그리고 동시에 감각이 있어야 한다. 공동체 감각, 어떤 주제, 사진을 올리면 유독 민감할 친구가 있다면 피해 주거나 하는 등의 배려심이 있으면 좋겠다. '적당한', '중용'은 애매하다. 극단적인 요소들을 생각해보고 거기서부터 거리를 두면 '적당한' 지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을 하되 하지 말아야 할 말, 하지 않는 게 좋을 말들을 잘 취사하면 된다. 이건 규정지을 수 없는 감각의 문제이다. 올릴 때 균형 있게 올리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등산 이야기라면 중간에 힘든 여정을 써주거나 쉽지 않았단 걸 이야기해주는 식으로 균형을 맞출 수 있다.
득을 누리려면 독을 다루어야
SNS를 하면 얻을 것들이 많다.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한 이들과 연락이 닿기도 하고 평소에 자주 만나기 어려운 이들의 소식을 들을 수도 있다. 요새는 유머 자료와 방송 자료들(저작권)이 바로바로 올라와 보기도 한다. 또 여러 사회 이슈와 다양한 정보들을 볼 수 있으며 유명 연사들의 포스팅을 통해 인사이트를 얻기도 하다.
득도 or 득독(毒)
얻은 게 있다면 잃는 것도 있겠다. 득이 되는 만큼 독이 된다. 약이 되는 풀과 같다. 잘 쓰면 약이지만 못 쓰면 독인 것처럼. 사용하는 이의 실력에 달려 있다. 소식이든 정보든 그것을 보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 우린 통근길과 침대 위에서 그 시간을 기꺼이 할애한다. 모든 포스팅이 유용한 게 아니기에 아닌 소식들을 걸러야 하지만 그러면서 신경을 써야 한다. 열등감에 빠질 위험도 있다. 시간의 투자 역시 균형이 필요하다. 필요한 것만 얼른 보고 끄거나 정해진 시간만 한다거나. 그렇지 않다면 포스팅의 홍수에 쓸려 가거나 그 독성에 중독될 수 있다.
SNS는 TV 이상으로 삶에 닿아있다. TV의 폐해로 유명한 말은 '바보상자'이다. 계속 생각 없이 보게 하니깐. 그보다 더 자주, 많이 볼 수 있는 SNS는 TV보다 더 잘 다루어야 한다. 닿아있는 것을 잘 다룰 수 없거나 이런저런 요소들을 신경 쓰기 번거롭다면 역설적으로 SNS에 가장 많이 퍼진 명언 중 하나인 퍼거슨 경의 명언을 생각해보면 좋을 것이다.
트위터는 인생의 낭비다.
인생에는 더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다.
차라리 독서를 하기를 바란다.
알렉스 퍼거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