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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민씨 Feb 10. 2016

잘 쉬어보기

휴식에 관하여 (1)

오랜만에 긴,  황금연휴였다. 연휴가 다가오면서 두근거렸다. 어떻게 하면 푹 쉴 수 있을까? 잘 쉴 수 있을까? 설레는 마음이 있었다. 연휴가 됐다. 저번 금요일부터 연휴라고 생각했다. 설 당일이 월요일이어서 주말은 그냥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본가가 서울이라 월요일에 차례 지내고, 세배하고 이야기하고 점심 먹을 때쯤 나오게 됐다.


집에 와서 열심히(?) 쉬어야겠단 생각을 하고 왔다. 도착하고 잠깐 인터넷 좀 하다가 저녁을 먹고 그동안 밀린 여러 볼 영상들과 인터넷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페이스북도 간간이 하다가 이제 좀 쉴까 했더니 새벽이 넘었다.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은데 무언간 했다. 그런데 뭘 봤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지워진' 시간이었다. 너무 아까웠다.


잘 보낸 하루와 아닌 하루의 차이는?


(늦게 잔 덕에 늦게) 일어나면서 칼을 갈았다. 잘 쉬겠다고. 한 책을 정리하면서 쉼을 누리고 쉼을 배웠다. 독일 과학전문 기자인 울리히 슈나벨의 <행복의 중심, 휴식>이었다. 쉬기 위해서, 쉬는 것도 배워야 한다니. 하지만 덕택에 나는 오늘 제대로 쉴 수 있었다.


오늘 한 일은 책을 읽고, 정리하고, 틈틈 운동하고, 밥을 차려 먹고, 커피 마시고, 산책한 게 전부다. SNS는 거의 하지 않았다. 알람이 따로 뜨지 않는 한. 브런치와 페이스북에서 내 글이 이슈가 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처음엔 SNS를 자꾸 켰다 껐다 했다. 볼 것도 그리 없는데. 다행히 키자마자 끌 수 있는 자제력이 있어서 하진 않았다.


차츰 금단 현상(?)에 익숙해지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책 읽는 데도 몰입하게 됐고(나는 집에서 책을 잘 읽지 않았는데 그 이유를 요새 알 것 같다) 쭉 시간을 들여 정리할 수 있었다. 나중엔 듣던 음악마저 끄고 어떤 외부 자극 없이 시간을 보냈다. 음악이 없는 고요함에 적응이 될 무렵에 몰입감을 느껴지면서 무언가 생산성이 올라갔다. 어제와 차이가 무엇일까. 책에서 힌트를 얻었다.



현재를 온전하게 맛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믿었듯, 순간의 기쁨을 통해 신의 경지에 접근하리라.

<휴식> 울리히 슈나벨 저, 53쪽 중


현재를 '온전하게' 맛볼 줄 알아야 한다


현재를 맛볼 줄 아는 것, 오늘을 음미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음미'라는 표현을 쓴만큼 요리에 관한 이야기로 비유하려 한다. 요리에 있어 MSG는 논란이 많았던 요소다. MSG를 사용하면 착한 음식점이 아니네, 건강에 안 좋네 하면서 설왕설래가 많았다.


최근에야 논란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것 같다. MSG 자체가 유해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 대신에 크게 몇 가지 유의점만 이야기된다. 하나는 많이 넣으면 그 맛이 다 비슷해져서 많은 다양한 음식점의 요리들이 엇비슷하게 느껴진다. 또 미각이 마비 혹은 길들어져 맛있다고 착각하게 하거나 원래 재료 맛을 모르게 된다. MSG 없이는 음식 맛을 즐길 수 없게 된다. 마지막으로 MSG가 다른 맛을 덮어주니 저급 재료를 써도 맛이 나기 때문에 속일 수 있고, 저급 재료를 덮기 위해 더 자극적으로 맵고 짜게 만들면서 건강에 해를 끼치게 된다.


MSG에 뒤덮인 하루, 엇비슷한 하루


내가 그냥 흘려보내듯이 보낸 하루가 일종의 MSG로 뒤덮인 하루였단 생각이 들었다. 텔레비전과 여러 대중 매체는 MSG를 쓴다. 그냥 보기만 해도 시간이 간다. 개중엔 좋은 내용에 재미가 곁들여진 것도 있지만 아무 내용도 아닌데 그냥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것도 있다. 대개 자극적이며 재미있다. 그 안에 영양소가 있는지는 알기 어렵다. 이것으로만 시간을 보내니 그 하루가 어떤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어제 먹은 '시간'들은 분명 맛은 있어서 후루룩 먹었다. 그런데 먹은 직후엔 포만감을 느끼는 것 같았지만 바로 꺼져서 공복감을 느끼고 금방 다시 찾게 되더라. 재밌게, 좋은 하루를 보낸 것 같지만 마무리할 때쯤엔 오늘 뭐 했나 싶은 마음이 든다. 돌아보면 이런 날들이 잦았다. 대개 SNS 하거나 방송을 보다 시간을 다 보낸 하루에 느낀 날이다. MSG를 쓴 집들의 요리가 비슷하듯 이런 날들의 소회도 비슷하다.


MSG 없이 보낼 수 없는 하루,
MSG 없이 보내본 하루


좋은 음식이 맛있을 수 있지만 맛있다고 다 좋은 음식은 아니듯. 어떤 하루는 지루하고  심심할지 몰라도 유익하며 어떤 하루는 재밌게 보냈지만 실상은 낭비에 가까울 수도 있다. MSG를 사용하면 저가 재료로도 충분히 하루를 즐길 수 있지만, MSG가 없으면 한 끼라도 시간을 보낼 수 없게 된다. 스마트폰과 SNS 없이 하루를 보낼 생각을 해보면 드는 그 감정이 우리의 의존성을 말해준다. 나 또한 의존도가 높음을 어제 제법 실감했다.


역으로 MSG가 없이 자연적으로 우러나온 맛을 음미하는 하루는 어떨까? 자연적으로 맛을 우려낸 음식은 손이 가고 오래 걸린다. 각자의 실력에 따라 맛도 천양지차다. 각 재료의 맛을 느낄 수도 있다. 오늘 독서와 정리, 글쓰기와 운동, 산책과 사색이 어우러진 하루를 보냈다. 어떤 재료는 익숙해서 손질하기 쉽고 어떤 재료는 아직 손에 안 익어서 맛을 다 못 내기도 했다. 어설픈 맛일지라도 가능한 MSG를 뺀 하루를 천천히 맛보니, 맛이 괜찮다. 포만감도 있다. 이 과정 전체가 만족스러웠다.


연휴를 보내는 것도 비슷해 보인다. 우린 가능하면 설날 차례 음식을 직접 만들어서 올리려고 한다. 그렇게 하는 게 '정성'이자 설을 보내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함께 만들면서 이야기도 하고 만드는 시간을 함께 공유한다. 모든 음식을 그냥 다  사 와서 바로 차례를 지낸다면 연휴를 만끽하는 데 큰 부분이 빠진 것일 테다.


원재료로 만들어진 하루의 음미, 의미


각각 재료의 맛을 봐 둬야 나중에 MSG를 넣었을 때 어떤 풍미가 살아났는지 알 수 있다. MSG는 원재료의 맛을 보다 끌어내 주는 것이지 그 자체가 중심이지 않다. 또한 계속 MSG만 쓰면 원 맛을 모르니 내가 먹은 게 좋은지 아닌지, 신선한 건지 상한 건지를 모를 수도 있게 된다. 그처럼 내가 보낸 하루가 어떻게 보낸 하루인지 모르게  될 수 있다.


요리는 하는 것이지 되는 게 아니다. 내 하루는 내가 보내는 것이지 보내지는 게 아니다. MSG를 요리에 주로 두면 재료의 품질은  관계없게 된다. 실력도 그다지 의미 없어진다. 하루도 마찬가지다. 내가 보낸 하루가 아니라 끌려가는 하루가  될지 모른다. 외부 매체에 강렬한 자극들만 찾는 하루가 될 수 있다. 스스로 하루를 알차게 보낼 실력이 없어질지 모른다.


하루를 만끽할, 음미할 힘을 기르기


때로는 MSG를 빼고 오롯이 원재료를 곱씹으며 음미할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일종의 미각력도 는다. 하루도 마찬가지다. 외부 자극을 빼고 하루를 음미할 시간이 있어야 하루를 만끽할 힘이 생긴다.


휴식은 내가 쉬는 것이다. 남에 의해 쉬어지면 하루는 쉬어 버린다. 조미료에 뒤덮이면 쉰 지도 모른다. 걷어내고 신선한 재료들을 넣고 음미하자. 조미료는  그다음에 넣어도 충분하다.


평일엔 시간이 없어서 김밥 한 줄 걸어가면서 먹어야 할 날도 있다. 휴일까지도 그렇게 후다닥 먹기보다는 가능하다면 천천히 먹어보면 어떨까. 산책을 하기 위해 동네를 돌면서 오늘 하루 잘 보냈단 생각을 했다. 천천히 걸으며 생각한 덕에 글도 쓸 수 있었다. 어제처럼 겉으로 보기엔 별다른 거 한 것 없어 보이지만 알차게 보냈단 생각에 만족도가 높다.


자정이 지나 설 연휴 마지막 날이다. 오늘 하루 천천히, 맛있게 음미하며 쉬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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