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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민씨 Apr 03. 2016

S01E20 느리게 걷자, 누리며 걷다

좁은 화면 속 세상을 보고 걷기엔 화면 밖 진짜 세상이 너무 좋다

초등학교 2~3학년 때 많이 본 만화책이 있다. 이두호 작가의 <임꺽정>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이용은 아니었다. 사람을 때리거나 죽이는 장면과 또 남녀 간 흠흠... 다양한 이야기가 있었다. 4부에 걸친 이야기에 많은 캐릭터가 나왔다. 내가 매력을 느낀 캐릭터는 임꺽정의 처남인 '황봉출'이다. 오래전 기억이라 정확힌 모르지만 보통 사람의 2배 가깝게 빠르게 걷는 것으로 묘사됐다. 


빨리 걷는다는 게 내게 멋지게 느껴졌다. 3학년 때 같은 반 친구가 갑자기 다른 친구들에게 '인사하려고 따라 걸었는데, 너무 빨라서 못 따라잡았어'라고 말한 걸 들었을 때 왠지 빨리 걷는다는 게 더 '쿨'하게 느껴졌다. 그 이후로 쭉 빨리 걸으며 지냈다. 어렸을 때도 나보다 다리가 긴 성인보다 빨리 걸었다. 


커서는 걸어갈 때 내 앞에 누가 있는 걸 못 봤다. 지하철 환승하러 가는 길에서 어느 정도 비슷하게 출발하면 내가 제일 먼저 도착한다. 출근길이란 걸 감안하면 대부분 빨리 걷는 편인데도. 아예 뛰면서 걷거다 뛰듯 걷지 않는 한 일반적인 걷기에서 나보다 빨리 걷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어제였다. 근처 대형 서점에 가서 책 조금 보다가 집까지 걸어오려고 나왔다. 날은 포근하고 꽃은 폈고 슬슬 노을 지는 게 보였다. 보통 걸어서 집까지 20분 거리니깐 천천히 걸어가면 딱 저녁 먹을 시간에 맞을 것 같았다. 천천히 진짜 천천히 걸었다. 신호등이 바뀔 것 같아도 느긋하게 기다렸다. 천천히 걸으시는 할머니와 보폭이 맞아떨어져 한 블록을 동행 아닌 동행을 하기도 했다.


아무리 여유 있어도 여유를 갖고 느리게 걸은 기억이 없다. 얼른 도착해서 여유를 갖자는 게 보통 내 생각이었다. 안 갖던 여유를 갖고 걷다 보니 색다른 경험을 하기 시작했다.



걷다가 노을과 같은 하늘 풍경이나 이쁘게 핀 꽃이 있으면 찍으면서 간다. 그 속도가 걸음 속도에 맞춰 슥가다 훅 찍는 정도. 이번엔 아예 멈춰서 한 번 찍고, 다시 한 번 찍은 후 확인하고 걸었다. 



주머니에 이어폰과 손에 쥔 핸드폰을 넣고 천천히 걷다 보니 감각적으로 걷게 됐다. 천천히 내가 사는 곳을 보았다. 꽃들이 피어나고 겨우내 살아낸 고양이들이 곳곳에 있었다. 고양이 소리와 새소리가 들렸다. 괜히 한 번씩 벚꽃잎을 만져보기도 하며 거리에 차있는 목련과 다른 꽃향을 맡기도 했다.


공간을 만끽하며 걸으며 같은 공간을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8명을 봤는데 모두 핸드폰을 보고 이어폰을 꼽고 있었다. 몇 명은 어제의 나처럼 걸으면서 꽃 사진을 후딱 찍고 핸드폰을 다시 보며 가던 길을 갔다. 그들을 바라보며 그들이 지나가는 풍경을 보니 좁은 화면 속 세상을 보고 걷기엔 화면 밖 진짜 세상이 너무 좋단 생각이 들었다. 


30~40분 정도 걸릴 줄 알았다. 집에 오기까지 보통 20분 거리를 50분이 넘게 걸려 도착했다. 만족감이 조금씩 차올랐다. 여유를 누린다는 게 이런 거구나.  천천히 걷는 맛이 이거구나. 목적지를 알고 있으니 그저 걸어가면 되는구나. SNS도 음악도 없이 나랑만 걸어가는 시간이 나름 매력 있구나 싶었다.  


그 자리에 있는 나 자신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즐기며 걸어보자. 아름다운 꽃이 핀 이 봄에 한 번쯤은 자연스럽게 여유롭게 걸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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