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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민씨 Mar 24. 2016

S01E19 안경값 대신 얻은 생각 거리


1년 정도 쓴 안경이 문제가 생겼다. 정확한 이름은 모르지만 코에 걸치는 부분이 끊어질락 말락 했다. 안경을 닦으려고 안경을 잡으면 휠 정도로. 안경 안 쓰곤 집에서만 생활할 수 있어서 얼른 수리하러 샀던 안경점으로 갔다. 수리는 안 되고 새 안경테에 맞춰야 했다. 다행히 같은 회사의 비슷한 테가 있어 맞췄다. 


날이 좋아 집에서부터 안경점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40분 정도 걸었는데 이때 떠오른 생각 거리가 어쩌면 안경테값 이상일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은 몇 개의 단초이지만.


#1

안경 없이 이렇게 밖에서 걸어본 게 몇 년 만인지 기억도 없다. 해봐야 집에서뿐인데 그것도 밤에 잠자다 깨서 화장실 갈 때 빼곤 거의 없다. 집에 나와서 걸어가며 든 첫 번째 생각은 '뿌옇다', '세상이 뿌옇고 흐리다'였다. 멀든 가깝든 다 뿌옇게 보였다. 


옛날에 태어났으면 평생 이렇게 세상을 볼 수도 있었겠다. 내 시력과 같은 어떤 이는 이렇게 살았겠다. 뿌연 세상이 익숙한 삶도 있었겠다. 안경이 생겼기에 세상을 명확히 볼 수 있구나 싶었다. '생각'의 안경이란 걸 생각해봤다. 때때로 세상일은 모든 게 명확하지 않아 보인다. 명확한 시점, 시력을 제공하는 안경이 있다면 무엇일까? 지식, 지혜, 통찰, 관점 등이겠다. 


세상을 명확하게 보게 하는 걸 무엇이라 하든 '배움'의 의미가 된단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배울수록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생기고 바라볼 시력이 생긴다. 만약 안경 없이 여행 가거나 여행 가서 안경에 문제가 생기면 돈을 반쯤 날린 느낌이 들 것 같다. 보이는 게 없고 보지 못해 놓칠 게 너무 많을 것 같다. 여행이든 삶이든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세상을 누릴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보는 관점, 세계관이란 말을 쓰나 보다. 


안경 없이 스스로 뚜렷하게 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대부분 그렇지 못하다. 선각자, 선지자, 선견자로 불린 이들이 있다. 우리가 보기엔 불명확하고 알 수 없는 미래 일이 그들에겐 다가오는 게 뚜렷하게 보인 것이다. 어쩌면 단순히 '미래를 아는' 게 아닌 안경 없이도 뚜렷하게 세상일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걸지 모른다. 


그 외에 평범한 나 같은 사람은 배워야 한다. 먼저 보게 된 사람, 안경을 쓰고 먼저 발견한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내 안경을 맞춰야 한다. 안경 한 번 맞추고 끝이 아니라 틈틈 다시 시력에 맞게 조절하듯.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건 성인이 돼서 시력은 거의 바뀌지 않지만 생각의 시력은 바뀔 수 있다. 생각하는 만큼 바뀌기에 자주 안경의 도수를 조절해줘야 한다. 


각기 다른 시각, 시야만큼 세상에 안경이 많다. 생각의 안경은 도수뿐만 아니라 각자만의 색도 다양하다. 전체가 똑같이 보이는 게 아니라 잠자리 눈처럼 나뉘어 있다. 한 부분은 뚜렷이 그 옆 부분은 뿌옇게 보이기도 하다. 초점이든 색이든 내게 한 부분씩 맞춰간다. 


그렇다면 내가 맞춰가야 할 뿌연 부분은 어딜까? 과하게 착색된 부분은 없을까? 나는 지금 어느 정도 선명하게 세상을 보고 있을까?


#2

바보상자란 애칭(?)의 주인공 TV, 이제 그 역할은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이어가고 있다. 세 가지 매체의 핵심은 일방적인 정보 전달에 있다. 가만히 앉아서 틀어주는 걸 보면 된다. SNS와 인터넷 등을 이용하면서 스스로 생각할 능력을 잃게 된다는 점을 비판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이란 책이 있다. 이 책 외에도 이 책이 지적한 이야기들은 어렵지 않게 듣는다. 


내가 세상을 보는 게 아니라 남이 보여주는 세상을 보는 것이다. 남이 보여준 세상을 보는 걸 정말 세상을 보는 거라 말할 수 있을까? 동시에 내가 맞춘 도수는 세상을 정말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몇 군데가 뿌연 잠자리 눈 같은 안경으로 코끼리를 보면 같은 코끼리로 볼 수 있을까? 서로 같은 코끼리를 보면서 서로 다른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을까?


'본다'는 말을 생각한다로 바꿔보자. 내가 스스로 사유한 게 아닌 남의 생각을 흡수만 한다면 '주체적'인 내 생각은 없지 않을까? 동시에 남의 도움을 받아 생각하는 힘을 길렀다면 그때 '주체성'이 있다는 걸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어렵다. 설령 왜곡됐다 하더라도 내가 직접 보려고 한 것이 누가 보여주는 걸 그저 바라보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완전히 나 혼자 깨우친 게 아니라 도움을 받았더라도 나 스스로 생각해보려 하는 게 타인의 생각에 내 생각을 얹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3

사람들 시야가 안 좋은 게 대부분이라면, 너도나도 이렇게 뿌옇게 세상을 보고 있다면 어떨까? 아마 '뿌연' 세상이 정상적인 세상으로 여겨질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중에 그 세상에서 누군가는 '뚜렷하게' 본다면? 그 사람이 아마 위에서 말한 선견자 역할을 하겠지? 우리를 바른길로 가게 해주거나 자기 사욕으로 우릴 이끌거나. 명확히 보이지 않은 우리는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고 따르지 않아도 그는 충분히 환경을 이용할 수 있다. 고 생각하니 섬뜩했다.


#4

안경을 맞추고 가게에서 나와 밖을 봤다. 뚜렷하게 보였다. 세상이 뚜렷해진 걸까? 세상은 그대로였다. 나오면서 '세상은 그대로구나'란 생각을 했다. 세상을 보는 내가 명확히 보거나 뿌옇게 보거나 할 뿐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변하지 않은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눈에 보이는 게 잘 없으니 걸으면서 참 여러 생각을 했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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