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4일 차
프롤로그 000
영국 [런던]
001 인천-도하-런던 첫날
002 런던 둘째 날
003 런던 셋째 날
004 런던 넷째 날
프랑스 [파리]
포르투갈 [포르투]
포르투갈 [리스본]
스페인 [세비야]
스페인 [바르셀로나]
에필로그 100
일어났다. 개운하게 자서 정신이 맑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기로 한다. 어제 먹다 남긴 감자칩을 먹는다. 열 시쯤 되니 방 안 사람들이 슬슬 준비하고 일어난다. 그전에 일어나서 씻어봐야 머리를 말릴 수도 없고 해서 적당히 있어야 한다. 늦게 준비해야 돼서인지 누나 기류가 묘하다. 뭔가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 왜 아직 안 씻냐는 눈치를 말로 준다. 누나가 언제부터 일어나 준비할지 모르니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먼저 준비했으면 압박처럼 느낄 수 있으니. 소통이 부족했다. 씻고 준비한다. 준비 내내 좋지 않은 느낌을 받는다.
문득 어느새 일상스럽다. 러셀 스퀘어 역에 가고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과정이. 일상을 여행처럼 여행을 일상처럼의 의미를 이제 조금씩 완성해간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 사는 느낌이 들면서.
여행 중 길 담당은 나다. 프리마크라는 몰의 위치를 못 찾았다. 바로 못 찾은 거에 살살 화가 오르는 게 보인다. 내가 바로 찾지 못한 잘못이 있지만, 타인의 감정에 내가 좌우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나 때문에 여행이 힘들지 몰라도 이 여행은 동시에 내 여행이니까. 나로 인해 무언가 기분이 상했다면 말해서 풀어야 한다. 사람이 서로 무언가 풀어야 할 때 중요한 원칙이 있다. 내가 풀려고 무언가 이야기를 꺼내면 말할 기회를 기다린 것처럼 자기 불만도 말하는 모습은 피해야 한다. 푸는 시간이지 폭로의 시간이 아니니.
푼다고 하지만 풀리지 않는다. 말없이 걷는다. 나도 할 말이 없다. 이래서 같이 와서 따로 가는 걸까. 가족이란 것과 돈을 빼면 나도 그랬을지 모른다. 스트레스를 견디기 쉽지 않다. 굳이 이런 조율의 과정을 겪는 걸 피하고 싶다. 물론 이 와중에 새로운 기회가 생길 수도 있지만 당장의 순간의 스트레스는 심하다. 몸이나 마음이 약해졌을 때라면 충분히 충동적인 결정을 할 여지가 있겠다.
통증의 일차 원인이 신발인 것 같다. 신발 사러 프리마크에 왔다. 허리가 진짜 아프다. 여러 신발 중에 발에도 편하고 디자인도 괜찮은 신발 하나 찾았다. 이게 변수일까? 그랬으면 좋겠다. 신발을 바꿔 고통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엄마에게 포르투로 편한 신발을 항공 택배로 보내달라고 하고 싶다. 내 러닝용 신발이 그립다. 여기 물가로 그거 사려면 40만 원이니. 누나는 옷 구경하고 피팅하러 갔다. 그동안 이걸 쓸 시간이 생겼다. 이제 노팅힐로 가면 되겠지.
신발이 편하긴 하지만 아직 아프다. 짐을 줄여야 하나, 앞 가방만 매야 하나 변수가 뭘까 고민한다. 그저 계속 쉬어야 하는가. 러셀 스퀘어 근처엔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이 모인다. 유럽이라고 다 영어를 하는 게 아니니. 여기서 기다리면서 구경하다. 외국인들의 쇼핑 모습도 그 자체로 신기하다.
아직 관계가 다 풀리지 않는다. 서로의 말이 날카롭다. 서로의 반응이 전투적이다. 둘의 최선은 말을 마는 게 돼버린다. 작은 불만도 크게 느껴지고 참을 수 없는 종기가 되어간다. 서로가 갈등을 풀어가는 방식이 갈등을 일으키어 연쇄 폭발이 생긴다. 수없이 많은 선 중에 딱 하나를 잘라야만 하는 폭탄 해체반의 느낌이 이런 걸까. 위험한 전조라고 생각된다.
노팅힐에 도착했다. 역 근처 식당 중 좋아 보이는 곳에 들어왔다. 맛있어 보이는 메뉴를 시킨다. 감자튀김과 메인 메뉴 시키고 나서 감자튀김이 나오기 전에 누나가 사진을 부탁한다. 여러 장 찍었다. 내가 찍은 게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에 나도 반응해버린다. 터진다.
누나도 나에게 느낀 여러 불만들을 이야기한다. 나도 내 나름대로 있던 사정을 말한다. 계속 이야기하지만 연쇄 반응이 다시 시작된다. 이래저래 말로 풀리기 어렵단 생각이 든다. 누나도 이렇게 할 바에야 그냥 돈 나눠서 따로 가자고 한다.
이 와중에 메인 요리가 나온다. 냉랭한 분위기에 주인이 겸연쩍게 다가온다. 메인이 나왔지만 먹지도 못하고 계속 이야기한다. 영원히 끝날 거 같지 않은 분위기. 이 음식들이 식으면 아무 의미 없을 것 같아 그냥 먹었다. 맛있는 음식 덕인가 다시 이야기를 건네면서 어느새 조금씩 풀었다. 감정이 풀리니 맛있는 음식과 좋은 분위기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기분이 풀린 데인 음식도 음식이지만 엄청난 서비스가 큰 몫을 했다. 디저트까지 먹고 아까 못 찍은 사진을 다시 기분 좋게 찍는다.
여기 사장님은 한국에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내 생애 받은 서비스 중 짱짱맨이다. 유머러스하며 친절하고, 유쾌하면서도 공손하다. 센스는 물론이다. 무엇을 고를지 몰라 주문이 길어질 때나 선택을 어려워할 때도 위트 있게 넘어가고. 먹는 틈틈 와서 어떤 지 물어보며 관심을 갖는다. 다른 팀 대하는 모습에서도 즐거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팁 주고 싶다는 마음이 뭔지 이제 처음 알았다. 그냥 헤어질 수 없어 같이 사진 찍었다. 다시 노팅힐 오면 다시 들릴 테다. 나와서 깨달았다. 이름을 안 물어봤네.
노팅힐 거리를 걷는다. 여긴 집들이 진짜 이쁘네. 집 하나하나 열심히 찍는다. 신발이 좋다! 허리만 아프고 다리는 괜찮다. 이곳저곳 찍고 집들을 찍다가 시장 쪽으로 간다. 관광 상품화된 느낌과 로컬 시장 느낌이 동시에 든다. 열심히 찍고 찍다 화장실 들를 겸 커피리퍼블릭에 들어온다. 여기까지 일기 쓰고 나도 누나도 인스타에 사진 하나 올리고. 드디어 한국에서부터 영국에 오면 들어야지 다짐한 싱 스트리트 노래 들으며 쉬는 중이다.
누군가의 일상은 누군가의 풍경이 된다
다시 돌아오면서 식당에 들렀다. 이름을 물었다. 세쥬릭. 파리에서 왔다고 한다. 우리 이제 곧 파리에 간다고 하니 파리에 관한 조언을 들었다. 로맨틱하지만 무례하다고, 그래도 신경 쓰지 말라고. 감동이다. 이제 야경 좋은 곳으로 간다. 내일은 런던아이와 빅벤과 테이트 모던에 가기로 한다.
런던에서 감명 깊은 점은 사람들이 Sorry & thank you 가 습관적으로 나오는 곳이다. 너무 잦을 정도로 나와서 no problem. You're welcome 등의 반응도 습관적으로 나와야겠다 싶다.
튜브를 쭉 타고 어쩌다 알게 된 펍에 왔다. 이 동네엔 한인이 없다. 관광지가 아니란 이야기. 완전 로컬 펍인 듯싶다. 템즈강이 보인다! 런던 브릿지도 멀리 보인다! 만세! 좋다. 그냥 좋다. 들어와서 각자 마시고 싶은 걸 마신다. 맛있다. 누나랑 이야기 쭉 한다. 이런 분위기가 필요한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하며 여행 코스 짜고. 내일 갈 곳을 짜야한다. 주일 코스와 들를 교회도.
실컷 이야기하고 나와서 버스 타고 가려고 나왔다. 이 거리를 영 다시 못 온다니. 감정에 젖으며 창가를 보니 반대로 간. 기다리다 다시 타고 간다...
타워브릿지 도착한다! 런던 브릿지 역에 내려서 걸어갔다. 수지가 묵었다 들켰다는 호텔도 본다. 런던 브릿지 실물로 보니 ㄷㄷ하다. 이쁘더라. 엄청 찍는다. 여기에 런던에 온 한국인 총집합된 것 같다. 같은 방 옆 침대 아래칸 쓰는 한국인도 있다. 아예 작정하고 와서 찍는 듯. 세팅이 장난 아니다. 슬슬 화장실을 가야 하는데 도저히 화장실도 없고, 참을 수 없어(해)서 나온다. 근처 멕시칸 레스토랑에 왔다. 급한 데로 시킨다. 끼니도 때우고 화장실도 갈 겸. 치킨 브리또 과카몰 추가해서 먹는다. 치즈와 쌀 추가해서 먹는데. 진짜 졸맛이다. 역대급이다.
영국 음식 맛없다고 하는데 현재까지 경험상 이해불가다. 도리어 어떻게 맛없는 음식을 찾아 먹은 걸까 싶다. 그냥 끌리는 곳 땡기는 곳 아무 데나 가도 무조건 중박대박이었다. 내게 영국은 맛있는 음식이 있는 곳이다. 물론 순수 영국 음식은 어떤지 모르지만. 피시 앤 칩스도 맛났다. 생선 튀김과 타르타르소스를 한국에서도 안 좋아하고 안 먹는 내가 먹어도.
오늘 하루 돌아보면 우연찮게 들어간 모든 곳이 기회이며 만남이고 연결점이다. 진짜.우연한 것은 우연한 대로 그 의미가 있다. 대화, 싸움, 다툼, 회복, 화해, 돈독, 식당, 허기, 사람 등등의 요소들이 어떻게 언제 이어지고 화학 반응을 일으킬지 모른다. 여기서는, 오늘 하루는 단만짠맛쓴맛이 완벽히 어우러졌다.
먹고 다시 힘을 충전하여 브릿지로 간다. 사진 좀 더 찍는다. 열두 시 다 되어가서야 나온다. 숙소 한 번에 가는 버스를 타는데 이제 익숙하다. 타기 전에 놓칠 거 같아 첨으로 겁나 뛰어갔다. 돌아와 씻고 나와서 콘센트 있는 소파 쪽 가서 머리 말리고 온다. 사람이 없긴 한데 여기서 말려도 무방한 건지 잘 모르겠다. 외국인들은 방에서 안 말리는 것 같다. 사진 정리하고 잠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