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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민씨 Jan 11. 2017

너의 '이름'은, '너'의 의미는.

<너의 이름은.>을 보고,

영화 속 많은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애니메이션의 연금술
평범한 재료, 비범한 결과


평범한 이야기가 특별히 와 닿을 때가 있다. <너의 이름은.>은 딱히 특별하지 않은 내용이다. 어디선가 봤을 법한 설정들로 이루어졌다. 남녀가 바뀐다거나, 시간을 왔다 갔다 한다거나, 결국엔 잘 된다거나. 다 보고 나면 특별하단 생각이 든다. 작화, 음악도 탁월하지만 무엇보다 잘 섞었다.


<너의 이름은.>은 비슷한 소재들을 가지고 비범한 결과를 만들어 냈다. 요소 하나하나를 보면 특별하지 않다, 작화만 빼고. 처음 보면서 든 생각은 작화로 유명한 감독답게 엄청 힘을 썼구나였다. 종종 실사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사실감이 있었다. 영화를 보는지 애니메이션을 보는지 헷갈리기도 했다. 작화라는 특화된 재료와 흔한 재료들을 이리저리 섞고 녹이고 굳히니 금이 되는 연금술을 보는 것 같다.


시작과 끝을 만드는 무스비

평범한 재료라고 말했듯 구성 자체는 무난하다. 어려운 내용도 없고 특이한 주제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단지 특별할 따름. 그 특별한 느낌을 주는 동인은 영화가 주는 '의미', 흐름의 바닥에 있는 주제가 있어서라 생각한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질 수 있는가? 라는 의문에 답이 <너의 이름은.>이라고 봤다. 오프닝 곡 꿈등불에 '간절히 바라면 이룰 수 있다, 그 말에 눈을 돌리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라는 가사가 나온다. 이 가사를 보고 처음엔 그렇지 않을 수 있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했다. 영화의 결론으로 알 수 있는 감독의 대답은 그 말에 눈을 돌리지 말자였다. 감독은 눈 돌리지 말고 계속 바라본다면 이룰 수 있음을 말한다.


영화를 보다 보면 '무스비'라는 단어가 계속 나온다. 뭐든, 모든 무스비가 아닌가 할 정도로. 영화를 보며 무스비는 이 영화의 큰 맥을 잡고 있다.


무스비의 의미는 '잇는다' 그리고 신적 존재를 말한다. 사람을 잇는, 절대적인 무언가의 이야기. 시간의 혼재 속 시간의 형상에 관한 이야기. 그 안에서 서로 이어질 수 있는 인연을 말한다. 짧은 순간 심오한 이야기가 많이 나와 정확한 워딩을 기억하긴 어려웠다. 내가 이해한 것은 무스비는 일종의 필연의 가능성, 간절히 바란다면 반드시 이어지게 해주는 무언가의 섭리였다.


만들고, 꼬이고, 엉키고 끊어지고 그러다가도 다시 이어지는 것이 무스비란 말이 나온다. 무스비는 진짜 끈, 열린 가능성의 필연, 마음의 끈 등으로 묘사된다. 이 끈을 잡기 위해 끝까지 찾아간다면 언젠가 만나게 될 것도 무스비일 것이다.


<너의 이름은.> 이 말하는 내용에 담긴 의미는 삶 전반을 다룰 수 있다. 우리의 꿈, 사랑, 인생. 끈으로 매듭을 이어 만드는 것. 영화 속 실제 끈은 '마음'과 '인연'의 메타포로 쓰인다. 첫 장면부터 던져진 끈은 타키와 미츠하의 인연을 의미한다. 끈을 받은 타키는 미츠하게에게 '마음'을 담아 돌려주고 끈을 보고 찾는다.

 

무스비, 실의 목소리, 마음의 소리를 들어야


미야미즈 신사 축제를 준비하며 끈으로 매듭을 만들면서 동생 요츠하는 어려워하자 할머니가 말한다. 실의 목소리를 들으라고. 사람과 실 사이에 있는 감정을 느끼라고. 소리를 듣지 못하면 제대로 된 매듭을 지을 수 없다. 지금 어떤 실과 끈이 소리를 내고 있는지 모르면 그 끈을 찾을 수 없다. 무스비의 존재를 아는 것이 첫째로 중요하다.


이 매듭의 소리를 듣는 것이 중요하다. 듣고, 끝까지 바라고 찾는다면 만날 수 있으니. 설령 시간의 한계를 넘어, 불가능을 넘어서라도 이어지게 하는 것이 무스비다 싶었다.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했다면 이제 그 존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타키와 미츠하는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고 상황을 파악한다. 왠지 몰라도 둘이 잠들면 몸이 바뀔 때가 있다고. 서로 바뀐 삶과 원래 삶에서 좌충우돌을 겪는다. 각자 삶에 다른 성격으로 일을 벌이니 같이 규칙 세우기 시작한다.


핸드폰에 각자 몸에서 있던 일 적어주기로 한다. 서로 불만을 말하기도 하고. 다른 둘이 서로를 알아가는 것, 찾아가는 것. 다름을 인정하고, 아직 다른 곳에 있지만 언젠가를 기다리며. 존재를 인식하고 알아가고 있지만, 언제 대면할지,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미츠하가 처음 타키를 만났을 때는 타키는 전혀 미츠하를 몰랐을 때였다. 전혀 때가 아니었다. 동시에 그때여야 했다. 그때 전해준 매듭이 이어져 다시 연결하게 됐으니.


둘의 마음이 이어진 때도 혜성이 떨어지고 한참 시간이 흐른 뒤였다. 중요한 건 그들이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단 것. 서로의 존재가 있음을 확인했다면 만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실, 마음의 목소리를 듣고 마음의 끈을 잡는 것


미츠하의 노트에 적힌 '너는 누구야'라는 질문은 표면적으론 바뀐 몸의 주인이 누구냐는 의미다. 내부적으론 실, 마음의 목소리의 반응이다. 내가 찾아야 하는 '무언가'의 이름이 무엇인지 궁금해한 것이다. 그리고 본질적으론 '무언가'를 만나는 것을 바란 것이다. 이름은 본질을 가리키니깐.


미츠하가 끈을 처음 던졌을 때도, 타키가 끈을 돌려줬을 때도 둘의 무스비는 아직 다 이뤄지지 않았다. 동시에 둘의 이름을 몰랐을 때라도, 타키의 손에 끈이 없었을 때라도 둘은 이뤄질 수 있었다. 중요한 건 마음의 끈이었다.


서로의 '이름'보다 중요한 건 존재와 그를 향한 마음. 타키는 끈을 돌려주고도 계속 머리끈을 볼 때마다 무언가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또한 타키는 황혼에서 미츠하에게 이름을 적어줄 때 손에 이름이 아닌 마음을 적었다.


미츠하가 타키를 보러 가게 한 이유와 타키를 움직이게 한 이유는 같다. 마음이 있었으니까. 타키는 조금 더 직관적으로, 직접적으로 찾는다. 미츠하와 연락이 닿지 않자 지금까지 봤던 미츠하의 마을을 그려서라도 찾아간다. 이전에 보이지 않던 필사적인 마음을 볼 수 있다.


간절함에도 결국 안 되는 건 안 되는 건가 싶을 때 들른 라면집. 그곳 사장님이 찾던 이토모리 마을 출신이었다. 사라진 마을을 그린 그 진심에 사장님은 열심히 타키를 돕는다. 간절함이 무스비 매듭 하나를 잡아당겼다. 간절함은 다른 사람이 무스비의 끈을 당기는 데 도와주게 한다. 그렇지만 이내 사라지는 기억들. 다만 미츠하의 매듭은 실재했다. 무엇인지, 누가 준 것인지 모르지만 마음이 담겨 있다.


꿈이 꿈일지 현실일지


매듭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자마자 타키는 떠난다. 산당에 온 타키는 지금까지 겪은 게 꿈이 아님을 알게 된다. 누구도 믿기 힘든 이야기, 자신조차도 믿을 수 없는 꿈. 그 꿈이 진짜 꿈인지 현실인지 알기 위해 꿈의 장소로 찾아갔다. 꿨던 꿈은 현실이었다.


꿈같은 걸 바랄 때가 있다. 이게 내 꿈인가 싶어 갈 때가 있다. 가다가도 이건 내 꿈이 아닌가 접기도 하고. 그 목소리가 그냥 꿈인지 아닌지 희미해질 때가 있다. 미츠하처럼 때가 맞지 않을 수 있지만, 타키처럼 때가 될 때까지 찾아간다면 만났을지도.


재밌게도 할머니도 미츠하와 같은 경험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할머니는 만나지 못했다. 여러 환경상 만나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꿈만 꿨던 할머니와 달리 꿈의 소리를, 끈의 소리를 듣고 현실로 가져온 타키와 미츠하. 미츠하의 던져진 그 끈이 타키의 꿈으로 들어가 서로를 잇는 끈이 된다. 이어진 둘은 꿈을 현실로 이어, 이뤄낸다.


황혼의 계절을 보낸 뒤에 만날 수 있다


황혼, 저승과 이승의 경계, 과거와 현재의 만남의 시간. 존재는 느끼지만 닿을 수 없던 미츠하와 타키는 황혼의 때라 만날 수 있게 된다. 기적의 시간. 드디어 만난다. 각자 몸에 돌아온다. 타키가 건네주는 머리끈. 손에 마음을 적어준다.


타키가 적으려는 순간 황혼은 끝난다. 끝나자마자 계속 기억을 지워버리는 어떤 시간의 힘이 있다. 둘은 디테일은 잊게 되지만 마음에 강렬히 새겼다. 이름은 모르지만 만나면 알아볼 것이다. 반드시 찾아낼 것이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해도 만날 것을 다짐한다.


이름 대신 고백했던 타키. 잊힐 이름이 아닌 잊을 수 없는 마음을 새겼다. 이름을 몰라도 그 마음은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언젠가 만나면 바로 알아볼 테니. 그때까지 계속 찾기를 바라면서. 미츠하는 바라던 대로 도쿄에 왔다. 도쿄에서 항상 타키를 찾는다. 타키도 마찬가지. 타키는 성인이 돼서도 매듭을 보며 찾아 헤맨다. 찾고 있는 게 누구인지, 무엇인지, 어디인지 몰라도 찾는다.


서로 무엇을 찾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찾고 있다. 계속 엇갈리는 둘. 여름에서 겨울까지도. 그리고 벚꽃이 피는 황혼의 계절 봄이 왔다. '누군가 그는' 뜻처럼 그가 누군지 알 수 있는 때.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손에 닿을 것 같은 그 느낌이 들다가 마침내 만난다. 비도 그친 때 드디어.


너의 '이름' 보다 '너'의 의미


둘이 서로가 서로를 찾아 헤맸다는 건 알지만 왜 그랬는지 기억이 안 난다. 기억은 안 나지만 알 수 있다. 정확히 뭔지 몰라도 서로의 존재의 의미를 안다. 중요한 건 '이름'이 아니라 '존재'다. 이름은 본질을 가리키지만 본질이 아니니깐.


존재를 만나게 하는 건 마음의 끈이다. 마음의 끈을 놓지 않는다면 언젠간 만나게 되어 진짜 '이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름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존재를 알기 위해 이름을 묻지만, 존재를 찾고 나서 물은 게 이름이다. 영화는 존재를 찾아 만나는 게 중요함을 말한다. 끝까지 바란다면, 만날 것이다. 언젠가. 그 날엔 그 찾던 것의 이름을 마침내 대면하여 알게 될 것이라고.


그 존재는 무엇일까. 영화는 사랑을 말했지만 동시에 꿈도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꿈의 이름, 내가 만날 그 사람의 이름을 몰라도 어떤 필연이 있지 않을까. 무스비 끈을 놓지 않는다면 만날 수 있을. 이어질 때까지 어디에 있든 꼭 만나러 간다는 마음을 놓지 않는다면 만날. 지금 그 이름은 잊히고 몰라도, 존재가 마음에 각인됐다면.


영화는 원한다면 필연일 어떤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끝까지 바라고 바란다면, 불가능한 바람일지라도 끝끝내 이뤄줄 무언가, 무스비라고 통칭되는 가능성을. 그 꿈의 이름을 몰라도, 그 꿈을 담아둔 채 계속 찾는다면 이어서 이뤄지게 할 무언가의 끈을.


필연은 때때로 버거운 숙명 또는 받아들이기 싫은 운명 같은 단어로 느껴진다. 어떨 땐 이것이 필연이길 바라기도 한다. 영화는 그 중간에서 단 맛을 영리하게 뽑는다. 이뤄지길 바란다면, 이뤄질 수 있다고. 바라던 필연의 끈, 꿈의 소리를 듣고 찾았다면, 끝까지 잡고 있었다면 현실이 될 거라고.


영화가 끝나고 내게 꿈의 끈, 사랑의 끈의 소리가 들리는지 들어보게 했다. 들리기만 한다면 잡아서 이루고 싶은 마음에. 이제 하나의 끈은 잡았다. 그 끈을 잡았기에 이렇게 글을 쓴다. 글의 끈을 놓지 않기로 했다. 이 끈을 잡고 있다면 만나게 될 무언가의 이름은 무엇일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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