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끄러운 걸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다.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지하철을 탈 때 조금 시끄럽다 싶으면 짜증을 내뱉었다. 나도 시끄러운 건 별로 안 좋아하기에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 사람은 내게 소음에 민감한 사람으로 기억에 들어왔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생겼다. 그 사람은 밥 먹을 때 엄청 소리 내면서 먹었다. 일부러 소리를 내도 그렇게 못 낼 것 같을 정도로 크게.
음악 듣는 것도 좋아했다. 자기 음악을 크게 듣는 걸 좋아했다. 블루투스 스피커가 하나 생겼는데 그걸로 듣곤 했다. 들을 수 있긴 한데 다 같이 일하는 공간이었다.
소음을 싫어하는 사람이 시끄럽게 소리 내는 걸 들으면서 아이러니를 느꼈다. 자기가 싫어하는 행동을 자기가 할 땐 모르거나 괜찮을 수 있구나.
성경엔 이런 구절이 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마태복음 7장 1-5절)
인용한 구절이 내가 느낀 묘한 점을 잘 지적하는데, 내가 비판하는 부분이 역으로 나를 비판하기 쉽다는 점이다.
다시 생각하면 내가 비판하고 싶은 부분, 내가 싫어하는 부분은 내가 먼저 고칠 부분이 있단 이야기일 수 있다. 시끄러운 걸 싫어한다면 혹시 내가 어디서 시끄럽게 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내가 싫어하는 부분에 있어 자신은 떳떳하다고, 쉽게 말해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어떤 부분을 지적하거나 꼬집기 전에 자신을 돌아볼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돌아볼 부분을 먼저 살핀 뒤에야 상대가 고칠 부분을 부드럽고 겸손하게 잘 이야기해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싫어하는 그것을 남이 싫어하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끄러운 걸 싫어하는 시끄러운 그를 보면서 나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