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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민씨 Jun 07. 2019

<기생충>을 보고

*아래부터 스포일러일 수 있습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봉준호 감독이 이제 어떤 경지에 올랐단 느낌이 들었다. 강렬하기로는 <곡성>에 조금 못 미쳤지만, <곡성>이 처음부터 끝까지 강한 에너지를 주려 했다면 <기생충>은 회전목마로 시작해 자이로드롭으로 끝나게 한다. 내 양 옆에 있던 분들은 처음엔 하하호호했다가, 영화가 끝날 쯤엔 거의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영화 속 상징과 키워드 정리들은 이미 많은 리뷰가 있으니 영화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을 친구와 하나씩 이야기해보듯 적어본다.


영화의 시작과 끝 장면이 같다. 양말 걸린 반지하. 곱등이가 살아가는 곳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어쩌면 곱등이에 들어가서 사는 연가시가 곱등이가 있는 곳을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연가시는 숙주가 계속 살아야 살 수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다 자란 뒤 숙주가 원하는 대로 죽어야 살아갈 수 있다. 그전에 죽어버리면 자신도 죽는다. 숙주는 물론 자신에게조차 희극일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생물인 셈이다.


기우의 가족은 박 사장 집에 기생하기로 했다. 그때부터 영화는 희극일 가능성이 거의 없음을 알려 준다. 본격적으로 기생하기 전에는 큰 피해를 입히지 않는 선에서 기생한다. 공짜 와이파이를 얻어 쓰려는 것처럼. 가장인 기택은 통신비를 낼 생각보다 와이파이를 더 쓸 생각을 한다. 


기택은 무계획이 삶의 신조. 일어난 일에 대해 대응하지만, 더 나은 것을 위한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계획을 세워봐야 원하는 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실패라는 게 없기 때문에. 원래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대만 카스테라 사업이 계획과 달리 아예 폭삭 망해버린 것이 큰 계기가 됐을 것으로 보인다. 삶에선 원래 예측할 수 없는 비극이 일어나곤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 대응하려면 어느 정도 최악의 경우들을 대비해야 한다. 다만 꺾여버린 마음 앞에서는 어떤 것도 할 의욕이 없게 된다. 


기택은 힘든 상황 자체는 감내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지적하는 것에 대해 민감하다. 평소라면 결코 대들지 않을 아내에게 정색한 건, 아내가 바퀴벌레라는 표현을 썼을 때였다. 연기라고 했지만, 연기가 아니었다. 그때 그 감정은 진짜였다. 또한 자신에게 나는 냄새, 자기 정체성을 보여주는 냄새를 지적당했을 때 그는 조금씩 이성의 끈을 놓는다.


영화는 '냄새'에 대해 꾸준히 언급한다. 반지하 냄새, 마른 무말랭이 냄새 등으로 표현되는 냄새는 신분, 계급 등의 구분을 보여준다. 냄새는 비단 부자와 빈자 사이에만 있지 않다. 지하철 호선 별로 특징을 열거할 때 1호선의 키워드는 '냄새'이다. 그리고 그 냄새를 만드는 주체를 주로 나이 든 분들로 지목한다. 냄새는 세대 간에서도 선을 긋는다.


하지만 냄새는 선에 구애받지 않는다. 같은 공간에 있는 한 냄새는 피할 수 없다. 같은 자동차에 있다면 더욱더. 박 사장은 기택의 냄새에 힘들어한다. 인식하지 못했던 박 사장의 아내 연교 또한 인식하고 나서는 그 불편, 불쾌함을 감추지 못한다. 


젊은 세대는 1호선 탈 때 어려움을 느끼고, 냄새와 냄새나게 하는 주체에 대해 일종의 혐오감을 느낀다. 냄새에 대한 감정은 이성적으로 조절하기 어렵다. 그냥 그런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혐오감을 노골적으로 표현하진 않는다. 어떤 면에선 지하철을 타는 같은 입장이기에.


그러나 박 사장은 기택과 같은 입장이 아니다. 위에 있다. 그렇지만 가능한 직접 표현하진 않는다. 박 사장은 그래도 기택이 선을 지키는 한 참으려 한다. 그러나 냄새는 계속 선을 넘고, 기택도 조금씩 선을 넘는다. 아내를 사랑하냐는 질문은 박 사장에겐 선을 넘는 질문이었다. 그가 실제로 사랑하는지와 상관없이 기택이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던 것.


기택이 선을 넘을수록 박 사장은 냄새에 대해 불쾌함이 커져간다. 그럴수록 기택 또한 자기 존재에 대한 멸시를 느낀다. 자기에게 나는 냄새로 인해 느껴지는 혐오감에 인내심이 옅어진다. 박 사장이 연교에게 냄새에 대해 말하는 걸 들었을 때 분노는 증폭된다. 지하실 냄새 자체인 근세의 냄새를 맡았을 때, 자기 아내를 도와주기보단 차 키만 꺼내려할 때, 기택은 마지막 이성의 끈을 놓고 박 사장을 죽인다. 근세에게 보인 행동은 자기 자신에게 한 것과 같다고 여겼기에. 


기우는 싹싹하다. 돈 벌 기회를 계속 생각한다. 피자박스에 대한 클레임을 받을 때에도 알바 자리를 얻어내려 한다. 기우는 계획적이다. 계획이 있는 한 기세 있게 나아간다. 그렇게 과외 자리를 따낸다. 계획이 없다면 그는 무너진다. 충동적으로, 비이성적으로 변해 버린다. 민혁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기우는 금방 다혜와 사랑에 빠진다. 민혁이 그러했던 것처럼 다혜가 성인이 되기 만을 기다린다. 이미 연인처럼 지내고 있었으면서. 


계획을 계획대로 되게 하지 않는 건 거짓말이다. 거짓말은 그 자체로 스노볼이 된다. 갈수록 수습하기 어려워진다. 그럼에도 기우는 거짓말을 계획해서 계속 크기를 키운다. 기정, 충숙, 기택을 다 데려온다. 하나만 수틀려도 모든 게 무너질 수 있는 상태로 몰고 간다. 거짓말도 계획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 자체를 범죄로 생각하지 않는다. 



기우는 근세와 다송과 연결되어 있다. 다송이 그린 그림을 보고 기우는 보자마자 침팬지라고 한다. 연교는 자화상이라고 해서 넘어간다. 다송은 지하실에서 올라온 근세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고 그것을 그렸다. 근세는 지하실에서 올라올 때 네 발로 올라갔고, 기우는 다혜의 일기를 다시 놓으러 갈 때 네 발로 계단을 올라간다. 기우는 가족이 모두 피서를 보낼 때 혼자 잔디 위에 누워 볕을 쬔다. 근세 또한 그 집에서 몰래 빛을 누리는 걸 좋아한다. 


기우는 근세와 다송처럼 모스 기호에 대해 알고 있다. 다혜가 다송에 대해 묘사할 때 기우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다. 다송이 하늘을 갑자기 멍하니 쳐다 보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고 할 때 이미 알고 있듯이. 그건 기우가 다송이 실제로 그런지를 알고 있다기 보단, 다송의 행동 자체에 대한 이해가 있단 것. 어떤 면에서 기우와 다송은 동류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일하게 다송의 그림을 보고 한 번에 그 의도를 알 수 있던 것이다. 


또 그는 몽상적이다. 4수를 해서 안 됐지만, 자신은 서울대에 갈 거라 생각한다. 아빠가 지하실에 있는 걸 알게 된 뒤 성공해서 집을 살 거라 상상한다. 그렇지만 그건 요원한 일이다. 



기정은 손재주가 좋고, 입담이 좋다. 포토샵으로 가짜 졸업증명서도 쉽게 만들고, 검색을 통해 알게 된 몇 가지 지식을 설득력 있게 전한다. 또 가르치는 능력도 뛰어나 보인다. 천방지축 다송이를 어떻게 한 번에 휘어잡았을지 궁금했다. 어떤 글에는 스킨십과 관심이 부족했던 다송에게 기정이가 무릎에 앉히고 들어줘서 다송이가 말을 듣게 된 것이라 했다. 일리 있다고 본다. 거기에 더해 기정은 이미 다송이 같은 아이를 안다. 기우는 이미 그런 시절을 지냈다. 그때 그 아이의 심리가 어떤지 알 것으로 보인다. 


가족은 거짓을 진실로 만들기 위해 치밀하게 노력한다. 팬티를 벗어서 남기고, 복숭아털을 뿌리고, 미리 벤츠를 시승해보고, 대본을 외운다. 조금씩 박 사장의 가정을 무너뜨린다. 본격적인 무너뜨림의 시작은 가족이 캠핑을 간 뒤 집에서 난장판을 벌일 때부터. 넘어서는 안 될 선을 이때부터 넘어서기 시작한다. 


그리고 만난 문광. 거의 얼이 빠진 몰골로 들어와 지하로 달려간다. 문광과 근세가 먼저 기생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제 갈수록 돌이킬 수 없는 지점으로 달려간다. 봉준호 감독 특유의 삑사리로, 현실적인 실수로 인해 서로의 입장은 뒤바뀌고 뒤엉킨다. 살아남기 위해 기생하는 이들은 서로를 없애려 한다. 한 숙주에 두 기생충이 들어갈 수 없으니(실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도망치다 계획이 뭐냐는 기우의 질문에 기택은 계획이 있다고 한다. 생각이 있으니 가서 씻자고. 처음으로 리더십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계획은 '무계획'이었다. 기우는 기택의 '무계획론'을 듣고 나자 모든 걸 책임지겠다며 수석을 품에 둔다. 기우가 선택한 길은 숙주에게서 나오는 게 아닌, 다른 기생충을 없애버리는 것.


집에 물이 가득 찰 때 기정은 역류하는 변기 위에 앉아 담배를 피운다. 기택과 기우는 뭐라도 꺼내려하는 것과 대조된다. 체념하는 게 아닐까. 집을 잃은 상태, 어쩌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연교의 초대를 거부했다면 어쩌면 덮어졌을 수도 있을 일이란 생각이 든다. 


수석으로 인해 시작된 거짓말은 수석으로 대가를 치른다. 아내에게 복숭아를 문지른 기정 또한 근세에게 대가를 치른다. 기우는 한 달 뒤 깨어난다. 기택은 스스로 지하실에 들어간다. 또 다른 숙주를 통해 살아가기 위해. 이전 숙주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그렇지만 처벌을 통한 속죄는 피하고 싶어서.


<기생충>은 보고 나오면 충격에 빠지기도 하고, 영화가 보여준 여러 상징들로 이야기를 쉴 새 없이 하기도 한다. 영화를 보고 느꼈던 바를 하나로 엮어 정리하기 어렵단 생각을 했다. 글을 쓰기를 계속 주저했다. 하지만 한 번은 정리 안 된 채라도 풀어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친구에게 말하듯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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