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은 배워서 익힘이란 말이다. 학원은 교육하는 곳이다. 다시 말해 가르치고 가르친 대로 할 수 있게 기르는 곳이다. 요즘에 대다수 학교와 학원은 '학'에 집중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습'을 놓치는 건 아니다. '학'을 가르침을 통해 해주고 '습'의 방법을 알려주고 해보게 한다. 여기까지가 학교와 학원의 한계이다.
한계라는 건 그들을 탓하기 위한 용어가 아니다. 그들이 해줄 수 없는 부분이란 이야기다. 기타를 예를 들어보자. G코드라는 코드를 가르쳐주었다고 하자. 그럼 '학'을 한 것이다. 기타를 처음 잡는 내가 이제 G코드에 맞게 손가락을 줄 위에 놓고, 소리를 낼 만큼의 적당한 힘을 주어 눌러야 한다. 심지어 여기까지도 교육자가 해줄 수 있다. G코드를 친다는 건 이제 일련의 도움 없이 스스로 잡고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것이 될 때까지 하고 또 하는 시간의 총합을 '습' 혹은 연습이라고 한다.
연습에 쓰이는 단련할 련은 쇠를 두드려 단단하게 하는 단련의 그 련이다. 두드리기 전에 열에 달구어 부드럽게 한 후 두드려 단단하게 하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습'의 과정이다. 기타를 치면 흔히 손가락이 아프다고 한다. 철로 된 가는 줄을 말랑한 손가락 끝으로 누르니 당연히 아프다. 그 아픔을 견디는 과정이 기타 연주에 일차적으로 필요하다. 고통을 견디다 보면 껍질이 조금씩 벗겨지고 굳은살이 생기고 더욱 오래 연주해도 될 만큼이 된다.
내 뇌가 어떤 동작을 배워 몸에 구현할 수 있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교육자가 해줄 수가 없다. 이건 내 뇌가 해야 하고 내 뇌가 할 수 있고 내 몸이 움직여야 하며 내 몸을 움직이기 위해 내가 해야 한다. 아무리 먹기 좋은 음식을 해주고 설령 입에 넣어줘도 소화는 내가 해야 하는 것과 같다.
요새 학원에 다니면서 학구열이 올랐다. 그래서 내게 주어진 시간 모두를 수업을 듣는 데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오전엔 이런 수업을 듣고 저녁엔 저런 수업을 듣자고. 내가 듣는 영어 수업엔 15분 정도 연습하면 되는 숙제를 매일 해야 한다. 매일 했다. 그러다 문득 매일 15분 영어를 한다고 늘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들었다. 그 의문을 품고 다음날 수업에 들어갔다.
학습에 마법은 없다. 그저 연습뿐이다
수업의 선생님은 캐나다에 1년 다녀왔다. 가기 전 영어 초보인 친구를 다니고 있던 학원에 소개하고 갔다(내가 지금 다니고 있는 학원이며 동시에 지금 선생님은 예전에 이곳 학생이었다). 캐나다에서 돌아와 보니 그 친구가 그 학원에 선생이 된 것이다. 심지어 자기도 결코 논 게 아니라 진짜 열심히 했는데도 자기보다 영어가 엄청 늘었다. 놀라서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늘었는지. 친구분은 답했다. '마법은 없어, 그냥 연습뿐이야.' '매일 적어도 5시간씩'
그 수업을 듣는 학생 중 일부는 그런 경험이 다들 있었다. 어떤 분은 코딩을 잠을 안 자고 20시간씩 해서 몸에 경련이 일어난 적도 있고 피아노 입시를 준비한 분들은 5-10시간씩 매일 쳤다고 했다. 그래야 는다는 것이다. 그전 날 나의 고민, 15분 가지고 뭐가 늘까? 에 답은 당연히 늘 리가 없다였다. 당연한 사실임에도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어느새 나는 '학'만 하면 다 될 거라 순진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습'은 전혀 생각 안 하면서.
처음엔 아, 학원이 습을 안 해주는 거에 대해 살짝 분노했다. '아니! 이건 아무리 들어도 뭔가 늘 수가 없는 구조자나!!' 걸으며 계속 생각했다. 내가 틀렸다. '그건 내가 할 일을 넘긴 거야. 연습은 내가 해야 해. 내가 늘고 싶은 만큼.' 내가 15분을 했다면 딱 15분 정도 늘 만큼 한 것이다. 다이어트로 이야기하면 거실 5바퀴 돌고 만족한 것이다.
아무리 이연복 쉐프가 중식 비법을 알려준다고 해도 내가 옆에서 보고 연습이 없다면 그냥 구경한 것이다. 교육자는 해줘 봐야 동기 부여가 끝이다. 움직이는 건 내가 해야 한다. 물론 내가 원한다면 스스로 할 힘이 없으니 시켜달라고 부탁할 수는 있겠지만.
물을 끓일 것인가, 데울 것인가
학 이후 학을 습할 때까지 연하지 않으면 학습할 수 없다. 배우고 익힐 때까지 단련하지 않으면 내 것이 되지 않는다. 쇳덩어리를 가져와 어떻게 무엇을 만들지를 들은 후 열에 불리고 두드리지 않으면 그냥 쇳덩어리로 끝난다. 물은 50도면 그냥 뜨거운 물일 뿐이지 끓지 않는다. 따뜻한 물로 만족할 수도 있지만 티핑 포인트는 영영 오지 않는다. 나는 티핑 포인트가 될 때까지 연습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내가 무엇을 할지에 대한 확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왜 꼭 익힐 때까지 연습해야 하는가. 뭐든지 프로가 되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내 답은 '즐거움' 때문이다.
무언가를 배우고 때맞추어 그것을 복습한다면 역시 기쁘지 않겠는가
무언가를 배우고 때맞추어 그것을 복습한다면 역시 기쁘지 않겠는가 공자가 말한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는 말이 있다. 학, 하고 습, 하면 즐겁지 않겠는가? 그냥 습하는 게 아니라 때에 맞춰 때때로 습하는 것. 다시 말해 무언가 복습하고 연습하면 즐겁다는 것이다.
배우고 익히니 즐거운 경험이 있지 않은가? 영어를 배우니 영화에 들리는 게 있다. 그땐 자막을 보지 않고 배우의 세밀한 표정을 보며 감동할 수 있다. 익힌 말로 외국인과 띄엄띄엄 말할 때 소통이 되는 느낌이 있다. 즐겁다. 조금 익힌 그것에도 우린 즐겁다. 몇 가지 기타 코드를 익히면 딩가딩가 즐길 수 있다. 한 번 배우고 한 번 익히면 되지 않지만 때때로 익히어 내 것이 되면 즐길 수 있다. 익혀야 즐겁다. 익힌 만큼 즐겁다. 더 익히면 더 즐겁다. 즐겁지 않으면 어떻게 지속할 수 있을까?
즐겁다는 말은 항상 재밌고 기쁘다는 말이 아니다. 굳은살이 배길 때까지 아프고 힘들고 기타를 들고 다니기 무겁고 영어 말하다 보면 목이 아픈 그 과정 자체가 알 수 없는 희열을 준다는 것이다. 진짜 온 힘 다해 뛰면 숨이 벅차도 그때에 심장 뛰는 느낌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고 즐거움을 주듯 말이다.
어떤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
어떤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는 공자의 "지지자불여호지자, 호지자불여락지자." 란 말이 있다. 학만 한 사람은 그것을 좋아해 연습한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을 계속 연습하며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
그냥 좋아하는 사람은 힘들면 그만둔다. 즐기는 사람은 힘든 것도 좋아한다. 힘들어야 익힌다는 걸 알기 때문이고 익히면 더 즐거울 거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그냥 알고 그냥 좋아하는 사람이 따라잡을 수가 없다. 실력의 높고 낮음의 문제가 아니다. 프로이지만 귀찮아서 오늘 하기로 한 연습 안 하는 것보다 아마추어지만 손이 부르터 줄 잡기도 힘들어도 오늘 하려 한 연습을 끝마친 이가 더 낫다.
즐기는 사람은 배우고 때때로 익히는 사람이다. 고통이 익힘의 보증이란 것을 아는 사람이다. 배우면 익힐 때까지 연습해야 학습이 되는 걸 아는 사람이다. 익히면 익힐수록 더 즐겁다는 걸 아는 사람이다.
무언갈 배우고 있는가? 혹시 배우고만 있진 않은가? 익힘의 과정이 있는가? 익히는 과정을 스스로 추구하는가? 익힘에서 오는 고통을 알고 감내할 수 있는가?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가? 배우고 익히는 것이 즐거운가? 즐겁길 바라는가?
학습을 즐기는 삶
학습의 비밀은 그래서 뭔가? 영화 <쿵푸 팬더>에 국숫집을 하는 주인공 아버지는 자신만이 알고 비밀 소스의 비밀을 알려준다. 비밀은 "없다"는 것이다. 어떤 소스의 힘이 아니라 이것은 특별한 국수라고 믿으며 특별한 국수답게 손질하고 좋은 육수와 재료를 쓰는 것이다. 학습의 비밀도 같다. 비밀은 없다. 배우는 건 사실 쉽다. 어려운 건 익히는 것이다. 익혀야 내 것이 된다는 것, 익힐 때까지 계속 익혀야 하는 게 학습의 전부이다. 한 가지 비밀 소스는 '즐겨라'는 것. 이 자체는 학습의 요소이지 않더라도 학습 자체를 좌우할 대단한 힘이 있다. 이왕 배울 거 즐기면서 하자. 그리고 역으로 즐겁기 위해 배우자. 즐겁게 살자. 결국 다 즐거운 삶을 위함이 아닐까. 삶을, 학습을 즐기는 삶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