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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혜영 Dec 23. 2020

나의 예민함은 망할 놈의 상상력 때문이야

예민한 마음에는 이유가 있다. 나의 예민함은 팔 할이 넘치는 상상력 때문이다. 상상력이라고 해서 예술가나 과학자들의 창의적인 능력을 떠올린다면 오산이다. 뭐, 매사 최악의 상황을 떠올릴 수 있는 상상력도 재능이라면 재능일까. 상상에 가상의 스토리가 더해지면 시나리오는 늘 비극으로 끝난다. 인간의 뇌는 상상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한다는데, 상상 속에서 새드엔딩을 경험한 마음은 미리 겁을 내고 끝내 예민해진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을 켠다. 첫 문장을 쓰기도 전에 망할 놈의 상상력이 먼저 발동하기 시작한다. 상상 속에서 나는 백지에 한 글자도 채우지 못한다. 뭔가 끼적이긴 하는데, 읽어줄 만한 문장이라곤 하나도 없는 쓰레기다. 어찌어찌 글을 쓰긴 했다만 읽어주는 이도 없다. 되돌아오는 것은 비난과 조롱뿐. 상처 받은 나는 방구석에 틀여 박혀 글을 쓰려했던 자신을 원망한다. 빌어먹을, 처음부터 글 같은 건 쓰지 말아야 했어. 그랬다면 상처 받을 일도 없었을 텐데... 상상 속 화자의 대사가 이렇게 끝이 날 때쯤, 현실의 나는 그만 반사적으로 노트북 전원을 끄고 만다. 그리고는 '글쓰기'의 'ㄱ'자만 들어도 가시에 찔린 듯 몸서리친다. 마음의 평화를 위해 한동안 '글쓰기'라는 단어는 내 눈에 띄어서도, 귀에 들려서도 안 되는 말이 된다.


좀 과장해서 말했지만 나의 예민함이 작동되는 메커니즘은 대개 이런 과정을 거쳤다. 내 성격을 잘 아는 한 친구는 나에게 '걱정 달팽이'라는 닉네임을 붙여주기도 했다. 달팽이집처럼 걱정 주머니를 버겁게 짊어지고 다닌다는 의미에서였다. 때로 걱정 주머니는 쓸모가 있다. 나에게 해가 될 사람은 멀리 하게 하고, 상처 받을 만한 상황은 아예 만들지도 않는다. 위험한 곳을 피해 가도록 알려주는 것도 걱정 주머니다.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라는 속담은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역시 조상들의 지혜는 놀랍다. 


하지만 돌다리도 두들겨보면 못 건넌다, 돌다리도 두드리면 손만 아프다, 돌다리도 두드리면 무너진다... 는 누군가의 농담에 이내 뒤통수를 맞는다. 피식 쓴웃음을 짓다가 나도 모르게 걱정 주머니를 슬쩍 내려놓는다. 돌다리를 두드리고 또 두드리며 전전긍긍하는 내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니 참으로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마음의 평화를 위해 나에게 상처 주는 것들을 멀리하겠다는 의지는 매번 실패로 끝난다. 이상하게도 주변에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더 많이 모여들 것이고, 글쓰기에 관한 책과 정보들은 평소보다 더 넘쳐날 것이다.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가 그렇다. 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다가오는 법. 그러니 진정 마음의 평화를 원한다면 억압하고 방어할 것이 아니라 꺼내 들여다보고 흘려보내거나 호기롭게 넘어가야 한다.  


먼저 내 안의 진정한 욕망을 들여다본다. 나는 진짜 글을 쓰고 싶은가? 아니면 글 잘 쓰는 사람들이 부러워서 그저 한번 흉내 내 보려는 것뿐인가? 후자라면 예민해지는 것도 욕심이고 시간 낭비다. 만약 전자라면 '망할 놈의 상상력'을 좀 다르게 활용해보는 거다. 최악의 상황을 상상할 수 있다면 최고의 상황을 상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예민한 마음을 잘 가다듬으면 마치 실제 영화를 보듯 디테일한 상상도 가능하지 않을까. 


상상 속에서 나는 백지 위에 술술 문장을 써 내려간다. 문장과 문장 사이, 비어있는 행간에서도 빛이 날만큼 의미가 멋있게 완성되어 간다. 내 인생에서 최고로 잘 쓴 글이다. 많은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좋아한다. 독자들과 소통하며 가슴이 뛴다. 내가 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펼치는 동안 '착각하지 말라'는 혼잣말이 비웃음처럼 들려오겠지만 이제 나는 좀 뻔뻔해지고 싶다. 어쨌거나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상상의 효능은 증명된 셈이다. 망할 놈의 상상력이 그 이름도 찬란한 '흥할 놈의 상상력'으로 변모하는 순간이다.    


예민함도 유전일까. 직장에 다니는 엄마 대신 나를 키워준 할머니야말로 진정한 걱정 달팽이였다. 행여나 자식들이 어찌 될까 노심초사, 전전긍긍하던 할머니는 늘 판피린을 달고 다녔다. 감기약인 판피린이 할머니에겐 신경안정제였던 셈이다. 봉평에서 맛있게 먹은 메밀전병을 집에서 만들어보겠다며 야심 찬 시도를 했지만 결국은 엉망이 돼버려, 망했다며 속상해하던 내게 할머니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망한 게 어딨어? 하다 보면 다 잘 되는 거지..."  


그래, 이 세상에 망할 일은 없다. 살다 보면 언젠가는 뭐라도 하고 있겠지. 그러니 미리부터 겁낼 필요는 없다. 망할 일이 없으니 망할 놈의 상상력이란 것도 애초에 없는 거였다. 어차피 얼굴 천재는 글렀으니 이제부터 난 흥할 놈의 상상력을 발휘하는 천재가 될 테다. 흥해라! 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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