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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혜영 Jan 05. 2021

누구나 인생 최초의 기억이 있다

누구에게나 인생 최초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내가 아는 어떤 이는 1살 무렵, 엄마가 데려간 대중목욕탕 천정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던 장면을 기억한다고 했다. 1살 아기의 눈에 천정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은 어떤 정서로 기억되었을까.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닌지라 자세히 물어보진 못했지만 추측해보자면 꽤나 우주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연약하지만 영롱하게 반짝이던 물방울이 마치 별처럼 보였을지 모른다. 대중목욕탕의 습기가 만들어낸 천연 모빌이다. 그 별이 바닥을 향해 떨어진다. 한순간의 하강이었겠지만 아기의 눈엔 왠지 슬로 모션처럼 보였을 것 같다.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라는 시속 5센티미터로 말이다.


어쨌거나 이건 나의 상상일 뿐이고, 내 인생 최초의 기억이 별처럼 떨어지는 물방울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무용한 공상에 빠져본 것이다. 나만 아는 신비로운 기억 하나쯤 품고 있었다면 어른의 세상을 조금은 잘 버텨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으로 말이다.


지금도 오래된 일들을 잘 기억하지 못해 친구들에게 핀잔을 듣는 나로서는 6살 때의 기억이 가장 빠른 기억이다. 안타깝게도 신비롭다거나 아름다운 기억은 아니다. 스무 살이 넘어 어른의 세상을 사는 동안에도 한동안 그때의 기억이 나를 따라다녔었다. 개인적으로는 꽤나 안타깝고 비참한 기억이었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이제 그 기억은 시트콤의 한 장면처럼 우스운 해프닝으로 남았다.   


때는 어느 봄, 유치원에서의 첫 소풍날이었다. 한 작가는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라고 썼는데, 어쩌면 나도 그렇다. 당시 내가 유치원에서 배운 것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세상이란 내 맘과 다르게 참 무서운 곳이구나.


봄 햇살을 머금은 연둣빛 잔디 위에 우리는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삼삼오오 모여 앉아 엄마가 싸준 김밥과 과자, 주스 등을 꺼내먹기 시작했다. 작은 손으로 오렌지주스 뚜껑을 열던 나는 실수로 그만 돗자리에 주스를 쏟고 말았다. 반바지 안에 입었던 흰색 타이즈 한 부분이 금세 노란색으로 물들었다. 한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휴지를 찾아 얼른 닦아내면 그만일 일이었는데, 당황한 나는 어찌해야 할지 모른 채 돗자리에 고인 주스만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였다. 앞에 앉아있던 한 아이가 소리쳤다.


"선생님, 혜영이 오줌 쌌어요!" 


아뿔싸, 그것은 팩트체크가 전혀 되지 않은 채 공표된 가짜 뉴스였다. 김밥을 먹느라 내가 주스를 쏟는 결정적 장면을 놓친 그 아이는 노랗게 물들어버린 흰색 타이즈와 돗자리에 고여있는 노란색 액체를 보며 오줌을 떠올렸던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아이는 오줌 싼 현장의 최초 목격자가 된 셈이다. 아이의 우렁찬 외침은 문제 해결을 위한 간절함이었을까, 오줌 싼 친구를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은 구원자로서 말이다. 아니면, 사건 현장을 최초로 발견한 자로서 팩트를 알리고 싶은 사명감? 혹은 오줌 싸지 않은 자가 오줌 싼 자에게 갖는 일종의 우월감 같은 건 아니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성격이 급하고 목소리가 큰, 관심받고 싶은 아이였을까? 그 아이의 얼굴이나 이름은 전혀 생각나지 않지만 여자였고 목소리가 컸던 것만은 분명히 기억한다.  

  

별 것도 아닌 유치원 시절의 해프닝에 뭐 이리 진지하게 썰을 푸느냐 반문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친구가 오줌을 쌌다고 외친 6살 아이의 외침에서 왜인지 인간의 본능적 심리구조를 읽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적 느낌'이 드는 거다.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이야기했지만 사실 이 사건의 핵심 이슈는 그 아이의 외침 이후, 대낮에 그것도 갑자기 오줌싸개가 되어버린 나의 반응이 어떠했냐는 것이다. 한동안 내가 그날의 일에 대해 비참하게 느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인데, 안타깝게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왜 말을 못 했냐고? 오줌을 싼 게 아니라 오렌지 주스를 쏟은 것뿐이라고... 왜 말을 못 했냐고?   

 

그러게나 말이다. 말 한마디였으면 끝날 일이었는데, 그 한마디를 하지 못해서 몇십 년간 트라우마가 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자기주장도 제대로 못하는 억울한 바보, 세상은 선량한 나를 언제든 공격할 수 있는 무자비한 곳이 되고 말았다. 학창 시절을 지나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도 이 생각은 지속되어 나를 괴롭혔다. 나는 늘 할 말을 못 했고, 억울하게 당하는 느낌이었고, 타인과 그 타인들로 이루어진 사회는 나를 못살게 구는 사악한 집단처럼 느껴졌었다.


그 아이가 큰소리로 외치기 전에 나에게 먼저 오줌을 쌌냐고 조심히 물어봐 주었다면, 나는 오줌 싼 게 아니라 주스를 쏟은 거라고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혜영이는 오줌을 싼 게 아니라며 선생님이 큰소리로 팩트를 바로잡아 주었다면 좀 덜 억울했을까. 이 모든 것이 나의 왜곡된 기억이거나 상상일 수도 있겠다. 인간의 뇌는 기억을 조작하고 지어낼 만큼 충분히 똑똑하고 어리석기도 하니까. 중요한 건 기억의 진위여부가 아니라 나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어긋난 시선이었다.


훗날 최면 상담치료를 받으며 그 날의 기억을 다시 떠올렸고, 최면 속에서 6살로 되돌아간 나는 상담사의 지시에 따라 유치원 친구들 앞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나 오줌 싼 거 아니야! 오렌지 주스 쏟은 거야! 그러니까 함부로 말하지 마!!"


과거로 돌아간 6살의 내가 그렇게 외치는 동안, 카우치에 누워있던 어른의 나는 그만 펑펑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왜 눈물이 거기서 나와? 대체 그게 뭐라고?


거짓말 같지만 최면 상담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타인도 세상도 무척이나 해사해 보였다. 빛을 머금은 봄날의 잔디처럼 연하고 착해 보였다. 그날도 그랬을 것이다. 아마도 유치원 선생님은 내가 쏟은 오렌지 주스를 닦으며 나를 안심시켜 주었을 것이고, 친구들도 특별히 나를 놀리거나 왕따 시키진 않았다. 소풍날 누군가가 오줌을 쌌던 일쯤은 금세 잊어버린 채 하루하루 뛰어놀기 바빴을 것이다. 또, 엄마는 별 일 아니라는 듯 오렌지주스로 물든 흰색 타이즈를 깨끗이 빨아주었거나 새 것으로 사주었을 것이다.


소심하고 내성적이던 6살의 내가 감당하기엔 큰 일이었겠지만 어른이 되어도 미숙했던 나는 그날의 기억을 끌어안고 세상에 핑계를 대고 있었던 것 같다. 내 인생이 꽈배기처럼 꼬여버린 것에 대해 타인과 세상을 원망할 핑계, 못난 나를 끊임없이 자책할 핑계...


어른이 된 그 아이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아마도 큰 목소리와 자신감 있는 성격으로 멋지게 세상을 누비고 있겠지. TV에 나오는 기자나 승률 높은 변호사가 되어 있을지도, 그게 아니라면 아파트 부녀회장이거나 시크하고 능력 있는 싱글녀가 되어 잘 생긴 연하남을 만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의 첫 기억이 물방울이었다면 나의 첫 기억은 오줌이다. 전혀 신비롭지도 아름답지도 않지만 나름대로 '오렌지빛' 기억인 것만은 확실하다. 이제 나는 똑똑한 뇌를 움직여 6살 이전의 기억을 더듬어 보련다. 빈약한 기억력 때문에 도저히 생각나지 않는다면 오히려 기회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기억 하나를 맘대로 지어낼 수 있는 기회. 언젠가 뇌가 진짜 기억으로 속을 때까지 상상하고 또 상상해보련다. 이왕이면 우주적인 장면으로 떠올려야겠다. 빛날 미래의 날들을 위해 이제부터는 새 기억을 품고 살아가야겠다. 그러다 보면 타인에게도, 세상에게도 조금은 너그러워지지 않을까. 첫 기억은 망했는데, 인생 마지막 기억은 좀 아름다워야 하지 않겠나.


내 최초의 기억은 1살 무렵이었어. 하루 종일 비가 내리던 어느 여름날이었지. 갑자기 비가 그치고 창문 너머로 햇살이 들어왔어. 그때 내가 본 것을 난 아직도 똑똑히 기억해. 하늘에 걸려있던 무지개... 그게 세상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이야... 어때? 멋지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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