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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혜영 Jan 20. 2021

아무래도, 이건 내가 바라던 모습이 아니야

이런 날이 있다. 나의 모든 것이 싫어지는 날... 두루뭉술한 외모는 말할 것도 없고, 생각하고 말하는 방식, 글을 쓰는 스타일,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관점, 주로 먹는 음식, 자주 입는 옷, 매일 똑같은 머리 모양, 시간을 기가 막히게 허비하는 습관 등등. 이건 싫증이라기보다는 혐오에 가까운데, 한 번씩 자기혐오라는 방어할 수 없는 집중 포격을 받고 나면 흔들 다리 위에서 강풍을 맞은 듯 휘청댄다.


가끔은 날씨 탓을 하기도 하는데 그건 핑계에 가깝다. 미세먼지가 가득하다거나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 조건은 나에게만 주어진 상황은 아니기 때문이다. 미세먼지나 비가 원인이라면 대한민국, 반경을 최대한 좁힌다 하더라도 서울에 사는 사람 모두가 같은 날 동시에 자기혐오에 빠져야 할 테고 그로 인해 서울의 모든 직장과 카페, 버스와 지하철엔 자기혐오에 빠진 사람들로 넘쳐나야 할 것이다. 자기혐오에 빠진 좀비들로 도시 전체가 마비되는 건 시간문제다. 이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그러니 미세먼지나 하루 종일 내리는 비 같은 걸로 핑계대기에는 논리적으로도 오류가 많다.      


보통 이런 혐오의 발단은 짧은 문장 하나에서 시작된다. '아무래도, 이건 내가 바라던 모습이 아니야.' 

단어와 단어의 나열, 혹은 자음과 모음이 만들어낸 특정 길이의 조합이 어떤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것이 신기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렇게 만들어진 의미가 기분과 감정을 좌지우지하며 존재 자체를 흔들어버릴 만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아침에 일어나 양치질을 하다 거울을 바라본다. 부스스한 머리, 퉁퉁 부은 낯선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아무래도, 이건 내가 바라던 모습이 아니야.' 오늘 해야 할 청소와 운동과 글쓰기를 미루고 의미 없이 하루를 보낸 뒤 잠들기 전 엉망진창인 방을 바라본다. '아무래도, 이건 내가 바라던 모습이 아니야.' 머릿속에서 6마디의 문장이 입력되는 건 순식간이다. 하루의 시작과 끝 사이에 수도 없이 문장은 반복된다.


아무래도, 이건 내가 바라던 모습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대체 내가 바라던 모습은 어떤 모습이란 말인가? 아침에 자고 일어나도 이슬만 먹고사는 사람처럼 맑고 깨끗한 얼굴? 시간을 분단위로 짜서 해야 할 일을 척척 해내는 것? 다이어트 식단과 규칙적인 운동? 유능한 일처리와 매일매일 글쓰기까지? 집은 늘 감각적으로 잘 정리 정돈되어 있어야 하고? 이것이 현실에서 진짜 가능할까? 누군가의 인스타그램이나 TV CF 속에서 말고 실제로도 가능한 걸까?


아마도 누군가는, 대한민국에서 최소 1명은 그런 사람이 있겠지. 그래, 있을 것이다. 내 주변에도 타고나길 이슬처럼 맑은 피부로 태어난 친구, 시간을 분단위로 짜서 하루를 계획적으로 사는 선배, 다이어트 식단과 규칙적인 운동을 철저히 지키는 지인, 아침저녁으로 하루 2개씩 글을 쓰는 후배, 늘 집안 곳곳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언니가 있으니까. 내가 본 그들은 제법 행복해 보였다. 


내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어느 날, 나는 내 불행의 원인을 그들처럼 살지 못하기 때문으로 판단해 버린다. 어리석게도 그렇게 '함부로' 판단해버리는 것이다. 그 판단의 끝엔 늘 같은 문장이 이어진다. '아무래도, 이건 내가 바라는 모습이 아니야.' 그 문장 안엔 섣부른 기대가 숨겨져 있다. 자우림의 노래처럼 '지금이 아닌 언젠가, 여기가 아닌 어딘가'에 가닿을 수만 있다면 마치 내 삶이 마법처럼 빛날 수 있으리란 얄팍한 희망이다. 희망은 고문이 되기 쉽다. 


그렇다고 섣불리 현재의 나를 사랑하려고 무리해서 노력하진 않겠다. Love Yourself. 멋지고 아름다운 말이지만(게다가 나는 BTS를 좋아하기도 한다), 다년간의 연습 끝에 나는 나를 사랑하려는 노력을 멈추기로 했다. 나를 사랑하는 것은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란 걸 알았다. 나를 사랑하려고 노력하다가 또다시 좌절하면 그동안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나를 사랑하려 했던 노력과 반비례하여 깊은 절망에 빠진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쉬운 사람도 있겠지만 누군가에게는 복잡한 수학 문제를 푸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자기 사랑 과목이 있다면 나는 사칙연산부터 차근차근 다시 배워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아직 모르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있다면, 그 '중요한 사실'을 자각할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아직 열려 있다는 것이다. 


떠올랐던 6마디의 문장은 언제든 다시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 치솟았던 파도가 바닷속으로 사그라들듯, 6마디의 문장 또한 그것을 떠오르게 했던 뇌 속 미지의 공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 딜리트 키를 누르면 지워지는 모니터 속 글자처럼 6마디의 문장 또한 빈 공간 속으로 사라질 수 있다. 내가 그 문장에 의미 부여를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말 그대로 그것들은 모음과 자음의 조합인 기표 덩어리에 불과하니까. 


ㅇ ㅏ ㅁ ㅜ ㄹ ㅐ ㄷ ㅗ ㅇ ㅣ ㄱ ㅓ ㄴ ㄴ ㅐ ㄱ ㅏ ㅂ ㅏ ㄹ ㅏ ㄴ ㅡ ㄴ ㅁ ㅗ ㅅ ㅡ ㅂ ㅇ ㅣ ㅇ ㅏ ㄴ ㅣ ㅇ ㅑ. 

이 정체모를 기호들을 보고 자기혐오에 빠질 사람은 없지 않겠는가. 이제 머릿속에서 칠판지우개 하나를 떠올려 들고 기호들을 하나씩 쓱쓱 지워버린다. 이제 칠판엔 어떤 문장도 쓰여 있지 않다. 텅 비어 버렸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바로 하는 버릇이 있다. 머리맡에 놓여있던 스마트폰으로 밤새 꾼 꿈을 검색하는 것이다. 어젯밤에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바다에서 수영하는 꿈을 꾸었다. 수영을 못하는 내가, 그것도 바다에서 유유히 수영하는 꿈을 꾸다니... 


검색해보니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평온이 찾아올 꿈이란다. 아, 다행이다. 오늘도 내 머릿속에 지우개를 하나 달고, 소심하지만 씩씩하게 살아봐야지. 얼굴이 조금 붓고, 오늘 할 일을 제대로 못 해내고, 집이 조금 아니 많이 더러워도 생명엔 지장이 없을테니... 집이 더러운 건 생명에 조금은 지장이 있으려나? 그렇다면 오늘은 청소를 해야겠다. 자기혐오는 해도, 오래는 살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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