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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혜영 Jan 26. 2021

블루베리 요거트 드링크를 마시다 원초적 욕망을 발견하다

카페에 가면 보통 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 춥거나 비 오는 날의 진한 아메리카노, 더운 여름날의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좋아한다. 영하 10도 아래로 내려가는 한겨울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것도 온몸의 세포가 깨어나는 듯 짜릿하다. 커피가 입속의 침과 섞여 공기와 만나는 화학작용도 신선하다. 쌉싸름한 커피 맛이 혀끝에 남아있을 때 카페를 나와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면 혀끝의 커피 맛이 콧속으로 넘어가 특유의 기분 좋은 향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아메리카노와 사랑에 빠진 내가 달달한 커피나 논커피 음료를 주문하는 일은 거의 없는데(음주 다음날 가끔씩 스타벅스 망고 바나나 블렌디드를 마시는 것을 제외하고), 며칠 전 카페에 갔을 때 문득 다른 음료가 먹고 싶어 졌다. 앞사람이 주문을 할 때까지만 해도 당연히 따뜻한 아메리카노였다. 그런데 내 차례가 되자 찰나 사이에 생각이 바뀌었다. 보이지 않는 카페 요정이 내 머리 위에서 요란한 빛 가루를 뿌려대며 장난을 친 게 틀림없다.


"블루베리 요거트 드링크 하나요."


내 입에서 블루베리 요거트 드링크를 달라는 말이 나왔을 때 좀 놀랐다. 스스로도 낯선 의외의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뇌가 먼저 그렇게 하기로 결정한 것이라는 뇌과학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자유의지로 무언가를 선택하고 행동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실은 뇌의 결정에 대해 반응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날 나의 뇌는 커피가 아니라 블루베리 요거트 드링크를 마시고 싶었던 모양이다. 마침 뇌에서 '행복 호르몬'을 만들 재료가 부족했던 걸까? 행복 호르몬 레시피에는 상큼하고 달달한 맛이 향신료처럼 반드시 필요한 법이니까.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처럼 내 머릿속에 살고 있는 기쁨이가 오늘따라 블루베리 요거트가 먹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잠재적 변비를 예방하려는 뇌의 깊은 배려였는지도 모르고. 심심하고 권태롭던 개구쟁이 요정의 허튼 장난이었어도 상관없다. 결과적으로, 그러니까 새삼스럽게 블루베리 요거트 드링크를 주문해 마시며 나에 대한 몇 가지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었다.


카페에서 마시는 블루베리 요거트 드링크는 달달하고 신선했다. 역시나 뇌의 행복 호르몬 레시피에 필요했던 메뉴였음을 실감했다. 굳어있던 뇌에 기름칠을 한 듯 창작에 대한 아이디어가 상큼상큼 샘솟았다.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기분 좋은 설렘이었다.


문제는 컵에 남아있는 음료의 양이 줄어들면서 시작됐다. 두꺼운 얼음 층 아래로 블루베리 알갱이들이 보였다. 빨대 속으로 미처 빨려 올라오지 못하고 가라앉아 버린 것이다. 나는 얼음을 헤치고 빨대 구멍을 작은 블루베리에 맞추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빨아들였다.


우르르르-- 부르르르---


순간 남아있던 음료와 얼음이 뒤섞이며 빨대 빨아들이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경험해본 사람들이라면 알 것이다. 작은 블루베리 한 알을 기어이 입으로 집어넣겠다는 일념이 얼마나 큰 압력을 만들어내는지... 그리고 그 무리한 압력은 컵 속에서 요란한 진동을 만들어낸다. 옆에 앉아 있던 혼자 온 사람들이 동시에 나를 쳐다보았다. 공부를 하거나 노트북을 보고 있던 그들에게 소음이 되었으리라. 나도 모르게 살짝 수치심이 올라왔다. '우아하게' 아메리카노를 마실 때는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내가 느낀 수치심의 근원은 욕망과 관련이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욕망을 드러낸 것에 대한, 아니 나조차도 몰랐던 원초적 욕망 때문이다.    


어쩌면 안 먹어도 그만인 블루베리 한 알에 집착한다는 것이 놀라웠고, 그걸 빨아들이기 위해 있는 힘을 썼다는 것이 또 놀라웠다. 블루베리 요거트 드링크 하나 마시며 별 생각을 다한다 할 수 있지만 나로서는 의미 있는 발견이었다. 내가 사람들 앞에서 욕망을 드러내는 것을 창피하게 느끼고 있었다는 것, 생각보다 내가 욕망이 많고 욕망하는 것을 얻기 위해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어쩌면 안 먹어도 그만'인 것은 없다는 것, 나는 블루베리가 먹고 싶었다는 것...


그동안은 '안 먹어도 괜찮아, 없어도 괜찮아, 못해도 괜찮아... 그건 삶에서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야' 하는 마인드로 살아왔다. 겉으로는 겸손하고 양보 잘하고 욕심 없는 사람으로 비쳤을지 모르지만 실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욕먹기 싫어서, 경쟁하고 싶지 않아서 가졌던 태도가 자연스레 습관이 되고 나의 정체성으로 굳어진 것이다. 먹고 싶고, 가지고 싶고, 하고 싶고, 이기고 싶었던 마음을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면서 내 삶은 본래의 빛을 잃어버렸다. 중심에서 서서히 멀어져 갔다. 얼음 아래로 가라앉아 버린 블루베리처럼 말이다.


나는 딱딱한 얼음을 헤치고 블루베리 알갱이들을 마지막 하나까지 쪽쪽 빨아먹겠다고 다짐했다. 요란하고 시끄러워도 어쩔 수 없다. 내 돈 주고 내가 산 블루베리 요거트 드링크이지 않은가. 그래도 옆사람들에게 너무 방해가 되진 않도록 요령껏 빨아들여 보기로 했다. 원래 욕망이라는 것은 우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시끄럽고 요란할 수밖에... 그 낯섦과 무모함, 주변의 시선을 감당해보기로 했다.   


마침내 하나 남은 블루베리 알갱이까지 다 빨아들이고 난 후, 나는 일종의 쾌감을 느꼈다. 욕망을 위해, 궁극적으로는 나의 행복을 위해 마지막 힘을 다 써본 자의 해방감이라고 할까. 뇌의 선견지명 때문인지, 카페 요정의 장난 같은 마법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메리카노 대신 블루베리 요거트 드링크를 주문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앞으로 당분간 카페에서의 내 주문이 바뀌지는 않을 것 같다. 진한 아메리카노의 쌉싸름한 매력을 놓치고 싶진 않으니까.


그러다 문득 다른 음료가 마시고 싶어 질 때가 있겠지. 언젠가 한 번도 마셔본 적 없는 달고나 카페라테나 아이스 애플민트 티 같은 것들을 주문하고 싶은 날이 오게 되면 그때도 뇌의 판단을 믿고, 혹은 카페 요정의 마법을 믿고 기꺼이 낯선 것을 선택하겠다. 세상은 넓고 카페는 많고 음료의 종류도 다양하다. 그만큼 '나'라는 사람의 가능성도 무궁무진하다. 그러니 앞으로 나는 계속 발견되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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