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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혜영 Jan 28. 2021

자연발생적 옷장 기능상실 증후군

작가 캐럴라인 냅의 책 <명랑한 은둔자>를 읽다가 재미있는 표현 하나를 발견했다. 


자연발생적 옷장 기능상실 증후군. 


방금 당신은 옷장 문을 열었다. 안에 들어찬 옷들이 아무 이유 없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단순히 마음에 안 드는 정도가 아니라 흉측하기까지 하다. 대체 이런 옷들을 어떻게 입고 다녔지? 싹 다 내다 버리고 싶다. 마침내 당신은 이 시점에서 모두가 예상하는 그 대사를 내뱉고 만다.


"입을 옷이 하나도 없어..."


캐럴라인 냅은 이런 증상을 '자연발생적 옷장 기능상실 증후군'이라 이름 붙였다(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아직까지 의학계에서 명명한 증후군은 아닌 듯하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무릎을 쳤다. 입을 옷이 없다는 망념은 동서양을 막론하여 벌어지는 스펙터클 한 사건이구나. 


옷장에 옷은 있지만, 입을 옷은 없다. 다시 말해 옷장에 있는 옷들을 입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그 옷들이 '지금의 나'를 대변할 수 없다는 강한 저항이다. 여기에 단순히 몸을 가리고 보호하기 위한 옷의 기능적 측면은 없다. 옷은 세상을 향해 자신을 표현하는 도구가 된다. 옷을 통해 나의 취향과 개성, 아름다움을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절대로 아무 옷이나 입을 수 없다. 역설적으로, 옷장을 보며 입을 옷이 없다고 느끼는 것은 현재 나의 자아가 보잘것없이 허물어져 있다는 방증이 될 수도 있다. 옷을 '나'와 동일시한 자아가 필연적으로 다다를 수밖에 없는 결말이다. 


프리랜서인 나는 비교적 옷에서 자유로운 편이다. 굳이 정장을 입을 필요도 없고, TPO에 크게 무리가 없다면 마음대로 옷을 입을 수 있다. 옷이 많지 않아도 된다. 한 달에 몇 번 회의를 제외하고 보통은 집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게다가 매번 만나는 사람들이 달라지기 때문에 똑같은 옷을 입고 나가도 상관이 없다. 계절별로 '무난하고 적당하게' 입을 수 있는 옷 몇 가지만 있으면 살아가는 데 큰 지장이 없는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입을 옷이 하나도 없다며 중얼대는 부류다. 이런 짜증 섞인 불평이 터져 나올 때는 대개 오랜만에 '잘 나가는' 지인을 만나러 갈 때거나 일적으로 야심을 갖고 미팅을 갈 때다. 지금의 나보다 더 잘나 보이고 싶을 때 나는 내가 가진 옷들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 같다고 여긴다. 여기서부터 스펙터클 한 서사가 시작된다. 


생각해보자. 그 서사에는 여러모로 미숙하고 보잘것없는 내가 있고,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편집장 미란다(메릴 스트립 분) 같은 상대가 매의 눈으로 나를 평가하고 있다. 비록 입은 옷은 허접하지만 보이지 않는 능력과 인성은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어필하고 싶지만 나를 훑고 있는 상대의 시선에 벌써 기가 죽고 만다. 


당당하게 나를 드러내기 위해서, 꼭 명품으로 치장하진 않더라도, '나 이런 사람이야'하는 한 방을 스타일로 보여주고 싶다. 당장 쇼핑을 간다. 백화점과 쇼핑몰을 돌아다녀도 내가 원하는 옷은 없다. 쇼핑하는 자에게만 적용되는 이상한 원칙이 하나 있다. 마음에 드는 옷을 사려고 눈을 부릅뜨는 순간, 내 것이어야 마땅한 옷들은 어디론가 숨어버린다는 것이다. 물론 이 원칙에는 내가 가진 자금의 한계가 변수로 작용한다. 값비싼 것들 중에는 여러모로 마음에 드는 옷이 많을 테니까. 


어찌어찌 발품을 판 덕분에 나는 그럭저럭 마음에 드는 옷을 산다. 이 정도면 너무 과하지 않으면서 프리랜서다운 개성과 프로페셔널의 전문성, 크리에이티브한 면모까지 아낌없이 드러낼 수 있는 스타일이다(과연 이 모든 걸 만족시킬 만한 스타일이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새로 산 옷과 더불어 구두 굽의 높이만큼, 아이라인 끝의 치솟은 각도만큼 내 자존감도 한껏 높아진다.


그렇다.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아직 하수임에 틀림없다. 중증 '자연발생적 옷장 기능상실 증후군' 환자라 진단받아 마땅하다. 다행인 것은 내 증상을 내가 명확히 알고 있다는 것이다. 부족해 보이는 무언가를 겉모습으로 덮어 그럴싸하게 보이고 싶은 술수, 고상한 속임수다. 눈 밝은 이는 한껏 치장한 외피 너머 텅 빈 구석을 꿰뚫어 보고는 쯧쯧 혀를 차거나 짐짓 짠하게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겉을 꾸밀 시간에 속이나 채우라는 구닥다리 같은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평생 옷장 문을 열며 입을 옷이 하나도 없다는 말을 달고 살 것이다. 나는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도 멋지고 싶으니까. 그래야 패션 업계 사람들도 먹고살지 않겠는가. 


다만 마음의 결핍을 메꾸는 옷이 아니라 마음의 무늬를 드러내는 옷을 입고 싶다. 하루하루 웃고 눈물지으며 변해가는 감정의 결을 따라 마음의 무늬도 달라질 것이다. 때로 한없이 가벼운 파스텔 톤이었다가 한낮의 태양처럼 뜨겁기도 했다가 때로 늦가을 낙엽처럼 깊어지고 짙어지겠지. 그러니 시시각각 변해가는 마음의 무늬를 드러내려면 새 옷은 늘 필요하다. 그리하여 캐럴라인 냅이 '자연발생적 옷장 기능상실 증후군'이라 명명한 이름을 나는 이렇게 바꾸고 싶다. 


목적의식적 옷장기능 업그레이드 시스템. 

 

매일매일 멋있는 나를 보여주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옷장의 옷들을 새 것으로 채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옷을 살 수 있는 자금 사정이 지금보다 넉넉해진다면 금상첨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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