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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혜영 Feb 16. 2021

출발선상의 두려움

드라마 <청춘시대> 시즌1은 지방에서 상경한 대학 신입생 유은재가 셰어하우스를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새 학기 새 출발의 설렘이 가득한 3월이 바로 코앞입니다." 버스 라디오에서 DJ의 한가로운 멘트가 들려오지만, 귀밑에 멀미약을 붙인 은재는 설렘보다 두려움이 앞선다. 은재의 내레이션은 이렇게 이어진다.


"새 학년, 새 학기, 새 출발... 그때마다 나는 악몽을 꾼다. 나에게 처음이란 것은 늘 설렘보다는 두려움이다."


<청춘시대> 시즌1의 1회 타이틀은 '출발선상의 두려움'이다. 드라마 속 유은재처럼 나에게도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는 일은 설렘보단 두려움에 가깝다. 체육시간에 100미터 달리기를 할 때면 내 차례가 오는 게 늘 두려웠다. 출발선 앞에서 총소리를 기다리며 준비자세를 취하는 그 시간이 너무나도 공포스러웠기 때문이다.

탕! 총소리가 울리면 꼴찌를 하든, 중간에 넘어지든 어떻게든 달려 나가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발선상에서 총소리를 기다리는 그 몇 초의 시간은 정말이지 숨이 조여 온다. 반사신경이 느린 나는 총소리가 울리는 순간, 움칫 놀라 뒤로 주춤하고는 남들보다 한발 늦게 출발하곤 했다.


새 학기 첫날, 친한 친구와 같은 반이 되지 않은 해에는 누구와 화장실을 같이 가고 점심을 함께 먹어야 할지부터 걱정했다. 어색한 교실과 새로운 담임 선생님, 같은 반 학우들이 만들어내는 낯선 공기가 꽤나 불편했었다. 3월 초는 겨울도 봄도 아닌 어정쩡한 시기다. 아직 쌀쌀하지만 코트를 걸쳐 입기엔 우중충하고, 교실에 난방을 하기도 애매한 계절. 그런 계절에는 건물 바깥보다 건물 안이 더 서늘하고 차갑다. 내게 3월의 교실이 그랬다. 시멘트의 차가운 냉기가 교복 안쪽까지 파고드는 느낌...  


훌쩍 나이가 들어버린 지금도 새로운 모임에 나가 자기소개라도 해야 할 일이 생기면 내 차례가 되기 전부터 가슴이 콩닥거리고 얼굴이 빨개진다. 한 번은 평소 팬이었던 드라마 감독님에게 휴대폰으로 연락이 온 적이 있다. 공모전에 제출한 내 드라마 대본을 보고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당선이 되지 않더라도 종종 그런 연락을 받는 경우도 있다고 말로만 들었는데, 나에게도 이런 일이 생기다니 어찌나 놀라고 감사하던지...


하지만 기쁨은 잠시, 다음 날 약속을 잡고 감독님을 만나기 전까지 내 마음은 100미터 달리기 출발선에서 총소리를 기다릴 때와 같은 마음이었다. 물론 설렘이 없지 않았지만 두려움과 긴장으로 바짝 얼어있던 나는 감독님과 대화를 나누는 내내 낯가림과 어색함, 불편함이라는 삼박자를 놀랄 만큼 잘 소화해냈다.


내가 소개팅을 싫어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처음의 낯가림과 긴장, 경직이 '나'라는 사람의 진짜 매력을 퇴화시키는 기분이 든다. 나태주 시인의 시 구절을 빌려 이야기하자면 나는 오래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편해지고, 오래 보아야 제 실력이 나오는 사람이다. 하지만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낯선 이를 오래 보아 주기는 쉽지 않다. 그런 이유로 늘 주춤했고 알아서 먼저 뒤로 물러났던 것 같다.   


출발선상에서 의연하고 능숙하게 달려 나가는 친구들이 늘 부러웠다. 낯선 사람을 만나도 오랜 친구처럼 금세 친해지고 처음 해보는 일도 뚝딱뚝딱해내는 이들의 능력이 놀랍게 느껴졌다.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사람들의 중심에 있었고 빛이 났다. 그들은 언제나 나를 주눅 들게 했다.   


그날 드라마 감독님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서점에서 책을 한 권 샀다. 책 제목은 <처음이 어색할 뿐입니다>. 부제는 '꼼꼼하고 성실하지만 조금 낯을 가리는 당신을 위한 처방전'. 일본의 한 정신과 의사가 쓴 책이었다. 문제가 생기면 책에서 답을 찾곤 했던 나는 제목만 보고 책을 구입했다. 집에 오자마자 단숨에 책을 읽어 내려갔다. 낯가림을 만들어내는 인지왜곡에 대한 부분이 인상적이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기가 막힌 해답을 찾진 못했다. 다만 책 제목에서 나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100%의 위로와 해답이 제목에 다 있었다.


'처음이 어색할 뿐'이니 얼마나 다행인가. 다시 말하면 처음만 어색할 뿐이니 언제나 희망은 있는 것이다. 달리기도 그렇다. 처음 총소리만 지나가면 두 다리는 달려 나가게 되어 있고 어쨌거나 상황은 20초 안에 끝이 난다. 그 처음만 지나가면 새 교실도 익숙해지고, 친구도 사귀게 된다. 연애도, 일도 다 그랬다. 처음 시작만 잘 넘기면 나의 매력과 실력은 차고 넘칠 만큼 발산되지 않았던가. 오래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편해지고, 오래 보아야 제 실력이 나오는 사람이라면 오래 보여주면 되는 일이다. 알아서 미리 뒤로 물러설 것도 없다. 낯설고 어색한 첫 순간에 긴장하고 당황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우리는 오래 볼 것이기에...

 

예전 같으면 부끄럽고 창피하여 그 드라마 감독님에게 다시 연락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미 무언의 거절을 당한 것 같은 주관적 느낌이 있었기에. 하지만 오래 보고 싶다면 용기를 내봐도 좋지 않을까.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새로 쓴 다른 대본을 메일로 보내며 피드백을 부탁했다. 부족한 대본이었는데도 감사하게 피드백을 받았다. 결과가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낯가림과 어색함에 뒤로 물러서지 않은 나 자신에게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청춘시대> 시즌1의 1회를 보면서 느낀 점은 예민한 나만 어색하고 불편함을 느끼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내 시선에서 의연하고 능숙해 보이는 그들도 각자의 위치에서 나름 애쓰고 노력하고 있었다는 것을 드라마를 통해 배웠다.  


보편적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나의 경우, 출발선상에서의 두려움과 처음의 낯가림은 잘 보이고 싶은, 잘하고 싶은 마음에서 기인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예민한 마음을 들키기 싫은 애씀의 결과이다. 결국 모두 쓸 데 없는 자의식 때문이다. 다음에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 또다시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얼굴이 빨개진다면 이렇게 말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다.


"저는 처음이 조금 어색해요. 낯을 좀 가리는데,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거예요."


낯을 가린다고 말하면서 일부러 냉랭하게 벽을 치지만 않는다면, 누군가는 진심을 알아주지 않을까. 당신을 오래도록 보고 싶다.


(덧붙임. 첫 조카가 다가오는 3월에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출발선상에 서게 될 조카의 3월이 늘 따뜻하길... 마음으로 기도하며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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