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친구가 그리 많지는 않은 편이다. 학창 시절 반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아이였고, 여럿의 친구를 사귀기보다는 단짝 친구를 만드는 게 더 쉽고 편했다. 활발하고 적극적인 반 친구들이 무리 지어 유쾌하게 노는 모습이 부럽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굳이 노력해서 속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피차 마찬가지여서 그들 쪽에서도 나에게 별로 관심은 없었던 것 같다. 다행인 것은 원만한 성격 덕분에 특별히 적을 만들진 않았고 그런대로 무난히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다.
대신 소수의 친구와 관계 맺는 밀도에 있어서만큼은 누구보다 깊다고 자부할 수 있다. 학창 시절 만난 친구들은 물론이고 사회에서 만난 친구와도 비즈니스적인 이해관계를 떠나 서로의 깊은 속마음을 보여주며 잘 지내고 있다. 몇 안 되는 그 소수의 친구들이 내 삶의 지분 가운데 3분의 1 이상은 차지하고 있다. 마음이 힘들고 지칠 때 친구를 만나 내 얘기를 하고 공감에 응원까지 받은 날에는 세상을 다 가진듯하다. 같은 취향으로 마음이 맞아 끝나지 않는 수다를 떨어 재낄 때는 세상 어떤 악의 무리가 쳐들어온다 해도 거뜬하게 물리칠 수 있는 힘을 얻은 것만 같다.
프리랜서이다 보니 매일 만나는 직장동료도 없고, 동창회나 동문회 같은 것도 나가지 않으니 불필요한 에너지를 쓰지 않아 좋은 것도 있지만 요즘 들어 걱정되는 게 하나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그에 걸맞은 사회적 관계도 자연스레 따라와 줘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거다.
이런 생각을 구체적으로 하게 된 계기는 몇 년 전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였다. 97세로 돌아가신 할머니의 장례식은 크고 화려하진 않았지만 진심으로 찾아주신 조문객들로 북적였다. 평소 할머니가 친척들에게 베풀었던 마음이 이렇게 응답을 받는 건가 싶어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 했는데, 무엇보다 조문객의 다수를 차지했던 분들은 아빠의 지인들과 동생의 회사 사람들이었다. 아빠는 총동창회 회장까지 할 정도로 발이 넓은 사람이고, 동생은 내로라하는 대기업 부장이었다. 그러니 아빠와 동생 쪽으로 온 조문객이 많은 건 당연한 일이다. 나야 일개 프리랜서이고 조모상에 예전에 함께 일했던 지인들에게까지 연락을 하는 건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굳이 부고를 알려서 그들의 바쁜 하루에 짐을 주고 싶지 않았다. 가까운 친구들에게는 문자로 부고를 전했지만 역시나 같은 이유로 장례식장에 오겠다는 것을 극구 말렸다. 그중에 고집스러운 몇 명은 장례식장을 찾아주었고, 내 뜻에 따라준 친구들은 따로 조의금만 보내주었다.
경조사에 찾아가고 찾아오는 일들은 사람이 한 평생 태어나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일일 텐데 내게는 뭐가 그리 힘든지 모르겠다. 특히나 나의 경조사에 오라고 사람들을 부르는 일이 조금은 더 어렵다. 언젠가 결혼이라는 걸 하게 된다면 결혼식을 올리지 말고 혼인신고만 하고 살아야지 하는 마음도 있었다. 한창 젊을 때는 통과의례 같은 행사 따위 한물간 유물이라며, 그런 허례허식 따위 의미 없다고 큰소리라도 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세상 일이 그렇지 않더라. 나 혼자만 살아가는 세상은 아니지 않은가. 때로는 가깝지 않은 누군가에게도 곁을 내어주어야 할 때가 있고, 예기치 않은 이가 내어준 곁에 그만 눈물이 흐를 때도 있다. 경조사라는 것의 본질은 결국 좋은 일에 함께 기뻐해 주고 슬픈 일에 함께 울어주는, 인간이 발명해 낸 나눔의 방식일 테다. 삶이라는 긴 길 위에서 때로는 축제를, 때로는 애도를 함께 할 수 있는 정거장 같은 거라고 할까.
할머니의 장례식은 상주가 아니니 그렇다 치더라도, 아직은 상상할 수도 없고 상상하고 싶지도 않지만, 언젠가 부모님이 세상을 뜨시게 되는 날... 그 날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변변치 못한 딸로 인해 부모님의 장례식장이 초라해질까 봐. 물론 친척들과 부모님의 지인들, 동생의 회사 사람들이 찾아오겠지만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휑할 것 같다.
그러던 차에, 방송작가협회에 가입을 하고 회원들에게 돌아가는 복지혜택을 살펴보다가 건강검진, 콘도 사용 등 외에 눈에 띄는 하나를 발견했다. 부모상을 당했을 때 협회 이름으로 근조화환을 보내주고 장례 관련 물품 등을 지원해준다는 내용이었다. 그즈음 동생을 만났을 때, 나도 모르게 이 말이 튀어나왔다. 약간의 기쁨과 자랑을 담아서 말이다.
"나 방송작가협회에 가입했는데, 부모상 당했을 때 근조화환을 보내준대. 물품도 지원해주고..."
내 말에 동생이 무심히 대답했다.
"그래? 잘 됐네."
잘 되긴, 뭐가 잘 됐다는 걸까. 누나가 방송작가협회에 가입한 것이 잘됐다는 것이겠지. 내가 자랑 섞인 어조로 말을 했으니까. 이후 내가 동생에게 한 말의 속뜻을 자각하고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 보면 이렇다. 나는 내심 부모님의 장례식에 부를 수 있는 지인이 많지 않다는 것에 걱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것, 부모님의 장례식이 쓸쓸할 것에 대한 걱정이 아니었다. 나의 사회적 관계가 빈약함에 대한 걱정, 그로 인해 부모님의 장례식장에서 나의 사회적 성공 여부가 성적표처럼 드러날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런데 방송작가협회에서 장례 물품 등을 지원해주고 그럴듯하게 협회 이름이 적힌 근조화환까지 보내준다니 어쩐지 폼이 날 것만 같았던 거다. 내 지인들이 많이 오지 않더라도, 크게 이름을 날릴 만큼 성공하진 못했더라도 그 화환 하나만으로 떳떳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나의 밑바닥을 들여다보고 소름이 끼쳤다. 이건 아니잖아. 아무리 그래도... 부모님이 돌아가신 거라고! 그런 네 알량한 명예 따위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란 말이다!
친구는 많지 않지만 조문객은 많이 와주었으면 좋겠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마음이 또 어디 있을까. 게다가 부모님의 장례식에 조문객이 많이 와주었으면 하는 이유가 겨우 내 자존심 때문이었다니... 내가 이기적인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나란 인간의 허약함을 현미경으로 깊이 들여다본 기분이었다. 어떻게, 지금이라도 분명한 목적성을 갖고 사회적 관계를 넓혀가야 할까. 할 수 있을 만큼 더 노력해서 명성을 쌓고 성공이라는 것을 하여 지인을 많이 만들어놓아야 할까. 아니, 부모님의 장례식에 찾아온 조문객 숫자로 한 인간의 존재성을 평가할 수는 있는 걸까.
욕심 많은 나는 여전히 갈등한다. 친구가 많아지는 것은 불편하지만, 언젠가 부모님의 장례식을 치르게 되는 날이 올 때는 조문객이 많이 와주었으면 좋겠다. 아니다. 소망을 하려면 좀 더 건설적인 소망을 해야 한다. 조문객 숫자 따위 미리부터 걱정하고 있을 일이 아니다.
나의 소망은 이렇다. 내 소수의 친구들과의 우정이 더욱 돈독해졌으면 좋겠고, 부모님이 가능한 더 오래오래 건강하게 내 곁에 함께 있어주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