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의 쓸모

by 조혜영

지하철에서 웹소설 <재혼 황후>를 보다가 덜컥 숨이 막혔던 적이 있다.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 흠뻑 빠져들었고 빠져들다 못해 좁은 스마트폰 액정 속 가상의 세계로 훅 들어가 버렸는데, 그 세계에서 벌어지는 암투와 음모를 내 마음이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주인공들이 서로를 미워하고 증오하고 갈등할 때마다 가슴 중앙이 쪼그라드는 느낌이 들면서 목과 어깨가 딱딱해지고 숨이 가빠져왔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죽겠는데, 궁금해서 마음이 급해질수록 내가 죽게 생겼다. 안 되겠다 싶어 보던 화면을 끄고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 심호흡을 하며 한숨을 돌렸다. 그 날 이후, 더 이상 끝까지 읽을 수 없었고 안타깝게도 <재혼 황후>의 결말을 아직 모르고 있다.


드라마나 영화도 마찬가지다. 감정의 최저점과 최고점을 넘나드는 소위 막장 드라마를 잘 보지 못한다. 이를 극복해보고자 최근 방영되고 있는 <펜트하우스>를 보았는데, 시즌1을 그럭저럭 잘 보다가 시즌2에서 그만두었다. 역시나 가슴이 답답해지며 숨이 가빠지는 증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좀비물이나 호러, 스릴러도 잘 보지 못한다.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킹덤>도 시즌1 1회 앞부분을 보다가 멈추었다. 일단 시각적으로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장면을 보는 게 싫다. 한번 두려움으로 각인된 장면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떠오른다. 특히나 밤에 잠을 자려고 불을 껐을 때, 혼자 타게 된 엘리베이터 안에서, 낯선 곳에서 화장실에 가게 될 때 불쑥 떠오르는 공포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긴장감, 아슬아슬 살얼음을 딛는 것 같은 상황을 재미있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에겐 말 그대로 '숨 막히는 공포'일 뿐이다.


어쨌거나 이 모든 것은 취향의 문제이니 굳이 불편하고 싫은 것을 찾아볼 필요도 없고, 내가 재미있어하는 것을 골라 보면 그만이다. 문제는 드라마를 쓰려는 작가로서 스스로의 자격에 의문이 드는 것이다. 이야기는 '갈등'이 핵심인데, 갈등 상황이 힘들어 제대로 보지도 못하는 사람이 과연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자문이다. 내가 쓴 이야기에 대해 업계 관계자들이 말하는 공통의 피드백 또한 극적 서사가 약하다는 점이었다.


드라마 작법 강의 첫 시간, 유명 드라마를 집필했던 노작가님의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다. '갈등'의 '갈'은 칡나무를, '등'은 등나무를 말하는데 칡나무는 왼쪽으로, 등나무는 오른쪽으로 감아 올라간다고 한다. 결국 이야기 속에서 갈등이란 칡나무와 등나무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감아 올라가며 서로 얽히듯, 다른 생각(목표, 신념)을 갖고 있는 캐릭터와 캐릭터가 부딪히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갈등이 잘 만들어진 서사일수록 이야기에 흡입력이 생기고 절정에서 카타르시스 또한 강하게 느껴질 수 있다. 모든 이야기가 다 그래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연습이 필요한 부분임에 틀림없다.


생각해보면 평소에도 갈등 상황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갈등 상황을 굳이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냐만은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부딪히게 되는 일이란 게 있지 않은가. 갈등이 마냥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때로 누군가와 갈등이 생긴다는 것은 내 생각과 방향성이 명확하다는 방증이 되기도 한다. 나의 신념을 지키고 실행하기 위해서 싸우고 설득하고 반드시 이겨야만 할 때도 있다. 그럴 때 갈등은 불가피한 선택이 된다.


그러고 보니 친구를 만나 메뉴를 정하는 사소한 상황에서도 갈등을 피하려고만 했구나(오늘의 메뉴를 정하는 것은 사소하지 않은, 어쩌면 아주 중차대한 사안이었는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친구가 피자를 먹고 싶다고 하면 나는 평양냉면이 미치도록 먹고 싶어도 피자가 먹고 싶은 척했다. 그래야 갈등 상황이 안 만들어질 테니까. "친구야, 나는 평양냉면이 먹고 싶어. 오늘은 평양냉면을 먹자!"라고 말하는 순간, 썩 내키지 않아 할 친구의 반응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 좋아. 오늘은 평양냉면 먹자."라고 선뜻 말해주면 고맙지만 조금이라도 뜨뜻미지근한 반응이 느껴지면 그 순간이 몹시도 불편했다. 차라리 평양냉면을 포기하고 친구가 좋아하는 피자를 먹는 게 더 마음 편했다. 나도 피자를 싫어하는 건 아니니까. 그래 놓고 그런 상황이 계속 반복되면 나를 배려하지 않는 친구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결국 갈등을 피하려고 했지만 해결되지 못한 갈등은 어떻게든 터져 나오게 되어 있었다.


왼쪽으로 감아 올라가는 칡나무와 오른쪽으로 감아 올라가는 등나무는 서로 얽히며 끝내 어떻게 자라날까? 평양냉면이 먹고 싶은 나와 피자를 먹고 싶은 친구가 오늘 꼭 그 음식을 먹어야 하는 각자의 분명한 이유를 갖고 끝까지 부딪힌다면 어떻게 될까?


현실에서도 상상하기 쉽지 않으니 이야기 속에서 흥미로운 갈등 상황을 만드는 일이 그토록 요원했던 거다. 갈등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꿔보려 마음먹었을 때 어느 브런치 작가님의 자기소개에서 이런 문장을 보았다.


'정반합 가운데 반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정반합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자신은 '반'을 맞고 있다는 말이 울림 있게 다가왔다. 그와 함께라면 '반'의 위치에서 한판 멋있게 싸워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갈등이 끝이 없고 일촉즉발의 위기로 점철된 듯해도 이야기 속에서는 어떤 갈등과 위기도 반드시 해결되게 되어 있다.


그 옛날, 아리스토텔레스도 <시학>이란 책에서 '처음-중간-끝'의 3장 구조를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처음을 지나 이야기에 몰입했던 우리는 중간 지점에서 맛본 갈등의 크기만큼 마침내 이야기의 끝에 다다라 큰 평화와 위안을 얻게 된다. 아마도 이러한 스펙터클을 즐기기 위해 우리가 이야기에 빠져드는 게 아닐까.


개똥도 약에 쓸 수 있다는데, 갈등의 쓸모도 차고 넘칠 것이다. 이야기를 만드는 작가에겐 더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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