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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혜영 Mar 19. 2021

사물의 목소리로 이야기하기

맛도 모르겠네.
색도 모르겠네.
무슨 냄새인지도 모르겠네.
어떤 향기인지 알고 싶네.


맛도, 색도, 냄새도 알 수 없는 ‘그것’은 무엇일까? 난센스 퀴즈는 아니다. 수수께끼도, 스무고개도 아니다. 몇 년 전 종로도서관에서 <중년을 위한 마음치유 글쓰기 수업>의 강사로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이 있는데, 그때 수업에 참여했던 Y님이 쓰신 글이다.


자연의 수많은 사물 가운데 하나를 골라 ‘나’를 표현한다면 당신은 어떤 사물을 택하겠는가. Y님이 선택한 것은 '물'이었다. 사물과 하나가 되어 그 사물의 목소리로 자신을 표현하는 글쓰기. Y님은 그 순간 물이 되어서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이 쓴 글을 읽고 난 후, Y님이 덧붙인 말은 이랬다.


"저는 50여 년을 맹물처럼 살아왔어요. 맛도, 색도, 향기도 없고... 제가 누구인지 모르겠어요."


명법스님의 책 <은유와 마음>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저 닮은 물건에 자신을 빗대어 말할 뿐인데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심지어 자기 자신도 모르고 있던 자신의 모습이 드러난다.


물에 자신을 빗대어 표현하는 순간, 그동안 자신이 생각해왔던 자아상이 고스란히 수면 위로 드러났다. 누군가는 물이 된 자신을 자유롭고 행복하다 느낄 수 있다. 정체되지 않고 어디든 흘러갈 수 있으니, 흘러 흘러 드넓은 바다가 될 수 있으니 얼마나 멋진 일이가. 하지만 Y님에게 물은 그런 대상이 아니었다. 물은 자신이 아무 맛도 없고 색깔도 없고 향도 없다고 느낀다. 물은 그래서, 도무지 자기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미처 다 말하진 못했지만 새콤달콤한 맛의 오렌지 주스나 톡 쏘는 콜라, 핑크빛 딸기우유, 향긋한 커피를 부러워하고 있는지 모른다.


강사로서 Y님의 말에 크게 공감했는데, 나 역시도 비슷한 생각을 하며 살아왔었기 때문이다. 나도 스스로를 맛도, 색도, 냄새도 없는 '맹물'로 여겼었다. 사람들이 나를 개성 없고 매력 없는 존재로 여길까 봐 두려웠다.


'나를 물로 보지 마!'


이런 말도 있지 않나. 사람들이 나를 물로 보는 것 같아, 그러니까 쉽고 만만한 상대로 보는 것 같아 화가 났다. 그럴수록 맹물 같은 내가 더 싫어졌다. 나를 싫어하니 자신감이 없는 것은 당연했다. 오렌지주스가 되려고, 콜라가 되려고 오랜 시간 '노오력'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알게 됐다. 오렌지주스가, 콜라가 되려 했던 노력은 결국 인공색소와 인공향을 첨가하는 일이었음을. 그건 진짜 내가 아니었다.


물은 죄가 없다. 죄는커녕 내 몸의 70%를 차지하며 나를 살리는 것이 물이었다. 인식의 전환이 필요했다. 물이어서 좋은 점을 찾아보기로 했다. 아무 맛이 없어 밍밍한 것 같지만, 목이 마를 때는 맹물만 한 것이 없다. 들척지근한 콜라와 오렌지주스가 풀어주지 못하는 갈증을 맹물은 해소해줄 수 있다.


또, 단단한 돌처럼 확고한 신념은 없지만 유연하게 흐를 수 있으니 어디든 섞일 수 있다. 고정된 모양은 없지만 네모난 그릇에 담기면 네모가 되고, 동그란 그릇에 담기면 동그라미가 된다. 어떤 모양이든 될 수 있다. 확신이 있고 고정되어 있기에 당당한 것이 아니라, 확신이 없고 고정되어 있지 않기에 당당할 수 있음을 물을 통해 배웠다. 생명의 근원이면서 자기 자신을 유연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물을 닮은 내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사물에 자신을 비유하여 표현하는 방법은 확실히 치유 효과가 있다. '나'를 주어로 표현하면 수치스럽고 두려워서 억압하던 감정도 '사물'을 주어로 하여 표현할 때는 한결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물'이 하는 말이지 않은가.


자신을 '나무'에 비유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땅 속에 깊이 뿌리내린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열매를 나눠주고 그늘이 돼 줄 수 있음에 감사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깊이 박힌 그 뿌리 때문에 답답하다고 한다. 멀리 날아가고 싶은데 움직일 수가 없어서 괴롭다고 말한다.


정답은 없다. 그저 자신의 현재 상태를 사물에 빗대어 이야기할 뿐이다.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게 전부다. 이런 글쓰기를 통해 스스로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객관화된 시선으로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자아상을 새롭게 만들 수도 있다.  


명법스님의 '은유 스토리텔링' 프로그램에 참여해 '나무'에 자신을 빗대어 글을 써보는 시간을 가졌었다. 자신이 어떤 나무인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떤 감정이 느껴지는지 적어보라고 했다.


처음 떠오른 것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소나무였다. 다른 소나무들과 함께 바다를 바라볼 수 있어 평화로운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어쩐지 아쉬운 마음이 올라왔다. 평생 이렇게만 산다는 게 소나무 입장에서 답답하게 느껴졌다.


한 사람씩 발표를 하는 시간, 내 입에서 나온 이야기에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소나무는 다른 세상이 더 보고 싶대요."    


소나무가 보고 싶어 하는 세상을 떠올려보라는 스님의 말씀에 다시 상상을 시작했다. 문득 과일농장에서 열매를 가득 맺고 있는 과일나무가 떠올랐다. 처음엔 귤나무이더니 열매가 귤에서 한라봉으로 바뀌었다. 제주도의 한가로운 농장에서 적당한 햇살과 바람과 수분을 맞으며 상큼한 과실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상상하니 소나무로 있을 때보다 재미있고 신이 났다. 땅속 깊은 뿌리로부터 건강한 흙의 에너지를 받아 탐스러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한라봉 나무가 좋았다. 할 수 있는 한 몸속 좋은 영양분을 모아 모아 최고로 맛있고 색이 고운 주홍빛 한라봉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지치고 힘들 때마다 지금 상상한 한라봉 나무를 떠올려보세요. 본인은 생명력 넘치는 한라봉 나무입니다. 앞으로 멋진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거예요."


마지막 시간, 스님이 해주신 말씀이 아직도 큰 힘이 되고 있다. 소나무인 채로 살았다면 느껴보지 못했을 새로운 자아상을 한라봉 나무를 떠올리며 발견했다.


스스로를 맹물이라고 생각했던 Y님이 자신의 색과 맛과 향기를 찾았을까. 아니면 무색무취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을까. 새롭게 써내려갈 Y님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길을 걸으며 평소에는 그냥 지나치던 자연의 사물들에 시선을 가져가 봐야겠다. 그들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을까. 혹여 자꾸 마음이 가는 사물이 있다면, 그 사물이 나를 통해 무언가 말을 하고 싶다는 신호일지도 모르겠다. 잠시 그 사물과 하나가 되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귀 기울여보련다. 결국 그 목소리는 내가 나에게 들려주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진짜 이야기가 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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