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일이지만 사회생활을 막 시작했을 무렵, 밤마다 의식처럼 행하던 스트레스 해소법이 있었다. 기도나 명상처럼 고상한 것도 아니고, 클래식 음악 듣기나 아로마테라피처럼 우아하지도 않다.
가족들이 모두 잠든 밤, 불이 꺼진 거실 소파에서 의식은 시작된다. 내 손엔 칼이 쥐어져 있다. 커터 칼일 때도 있고, 과도일 때도 있다. 한 호흡을 깊이 들이마시고, 마치 은밀한 범죄현장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 비장하게, 손에 쥔 칼로 무언가를 푹푹 찌른다. 다행히 피는 튀지 않는다.
걱정하지 마시라. 살아있는 생명체를 찌른 것은 아니었다. 당시 우리집 냉장고에는 5개씩 비닐팩으로 묶어 파는 작은 요구르트가 늘 있었는데, 내가 찌른 것은 바로 그 요구르트 비닐이었다. 비닐로 팽팽하게 묶여있는 요구르트와 요구르트 사이를 칼로 푹 찌르면 묘한 쾌감이 생기곤 했다. 5개가 묶여있으니 총 4번을 찌를 수 있었다.
비닐을 칼로 찌를 때마다 하루 동안 쌓인 답답함과 분노의 감정이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나를 열 받게 한 특정 대상을 생각하며 찌를 때도 있었는데, 그때는 약간 섬찟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내 안에 혹시... 잠재적 살인자의 DNA가 숨겨져 있는 건 아닐까?
그런 날에는 세수를 하다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 흠칫 놀라기도 했다. 마치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하이드가 나를 노려보고 있는 듯한 환시 아닌 환시가 느껴졌달까.
일말의 죄책감과 양심의 가책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그 '의식'을 끊지 못했었다. 그만큼 사회생활의 스트레스가 심했던 시절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 그때의 내 행동을 이해하게 된 것은 우연히 읽게 된 책 한 권 덕분이었다.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
융 심리학 전문가인 정신분석가 로버트 존슨이 쓴 이 책에는 '그림자'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집단 문화에 수용되지 못한 우리 내면의 어두운 특질을 그림자라고 부르는데, 그림자가 자체의 생명력을 지니게 될 때 삶의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하게 된다. 우리 안의 그림자가 괴물이 되지 않도록 그때그때 그림자를 표현하는 상징적 의례를 치러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러니까 요구르트 비닐을 칼로 찌르던 행위는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를 해방시키는 내 나름의 의례였던 셈이다. 빛과 어둠이 하나의 세트이듯 선과 악도 그러한데,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과 의무가 강해질수록 내 안의 악의 크기도 선의 크기와 비례해 비대해졌던 것이다. 그런 식으로 내 안의 악을 풀어내지 않았다면 인생의 어떤 부분에서 큰 문제와 직면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저자는 집에 초대한 손님이 생각보다 까다로웠고 예상했던 날짜보다 며칠 더 머무르게 되면서 불편한 마음이 올라왔었는데, 이를 처리하지 못한 채 꽃가게에 들렀다가 점원과 대수롭지 않은 일로 언쟁이 붙었다고 한다. 자기 안의 그림자를 애꿎은 낯선 점원에게 내려놓았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자신의 불편한 마음을 자각하고 그림자를 미리 해소해주었다면 꽃가게 점원과 언쟁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난 이후부터 내 마음을 틈틈이 알아차리면서 에너지의 균형을 맞추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동안은 부정적인 그림자에 잠식당한 채 살아왔었다. 칼로 요구르트 비닐을 찌르는 상징적인 행위 대신 이번에는 나를 해치는 파괴적인 쪽이었다. 배달음식을 잔뜩 시켜 게걸스럽게 폭식을 하거나 과음을 하는 식으로 말이다. 처리해야 할 음식물 쓰레기와 소화불량, 조금씩 늘어나는 몸무게를 자책하며 두 번째 화살을 맞을 때에야 정신이 들곤 했다.
그림자를 표현하는 상징적 행위로 저자가 권하는 방법 중 하나는 '유혈이 낭자하고 폭력적인 삼류소설' 한편을 써보라는 것이다.
아, 유혈이 낭자하고 폭력적인 삼류소설이라니...
어쩌면 그동안 억압되어 있던 파괴적인 그림자를 나와 남을 해치지 않으면서 나름 '건강하게' 풀어내는 방식이 될 수 있겠다. 그렇게 나는 피가 튀고 사람이 줄줄이 죽어 나가는 극악무도한 소설 한 편을 써보기로 한다.
노트북 앞. 한참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하얀 화면 한가운데 커서만 혼자 깜빡이고 있다. 아직 억압을 풀어헤칠 용기가 없는 걸까. 상상만으로도 자신이 없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찬찬히 생각을 좀 해보자.
주인공의 직업은 뭘로 할까? 그래, 주인공을 킬러로 하자. 유혈이 낭자해야 하니... 그런데 주인공은 왜 사람을 죽이는 거지? 우리의 주인공에게 이유 따윈 없다. 그냥 죽이고 싶으니까 죽일 뿐이다. 본 투 비 킬러.
아, 겨우 이 정도 생각하는 데도 힘이 든다. 뉴스에 나오는 연쇄살인범도 떠오르고, 아동학대범도 떠오르고, 무엇보다 피해자들의 고통을 생각하니 '본 투 킬러' 주인공은 안 되겠다. 이래 가지고 어디 억압된 그림자를 표출할 수 있겠나? 어쩐지 가슴이 더 답답해지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소설, 신춘문예에 응모할 거 아니잖아? 설마 책으로 출간할 생각은 아니겠지? 그게 아니라면... 그냥 일기처럼 나만 보는 거라면 뭔들 못하겠어? 그조차도 불편하면 다 쓰고 나서 파일을 삭제해버리면 되잖아? 영원히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도록 말이야.
왕년에 요구르트 비닐을 칼로 좀 찔러본 솜씨를 발휘해 유혈이 낭자하고 폭력적인 삼류소설 한 편을 제대로 써봐야겠다. 내 안의 그림자가 해방되고 영혼의 자유를 맞이할 수만 있다면, 오늘 제대로 '흑화' 한번 되어보련다.
부탁이 있는데, 평소보다 내 얼굴색이 환해지고 실없이 콧노래를 부르는 날이 오거든, 아마도 그런 날은 그림자가 해방된 날일테니, 몰래 내 노트북의 하드 디스크를 복구해 내가 버린 소설 파일을 다운로드해 주길 바란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불세출의 명작이 그 안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