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이 제63회 그래미 어워즈에서 수상했다는 기사를 읽은 후, 우연히 TV 프로그램에서 그의 예전 인터뷰를 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재능에 감사해하며 이런 말을 덧붙였다.
"연주를 할 때마다 숭고함에 가 닿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숭고함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귀에 들어왔다. 숭고함이라니... 일상에서 쉽게 사용하는 말은 아니지 않은가. 근 며칠간 내가 했던 모든 대화들을 떠올려보건대, '숭고하다'는 말은커녕 그 비슷한 뉘앙스의 단어조차 오간 적이 없었다. 그나마 비슷한 느낌이 나는 단어를 겨우 찾아본다면 '아름답다' 정도일까. 벚꽃잎이 흩날리는 풍경을 떠올리며 친구에게 "너무 아름답더라"라고 말한 기억은 난다.
하지만 제 아무리 두 손 간절히 모으고 '아름답다'라고 감탄한들 '숭고하다'는 단어의 꼬리조차 도달하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살면서 숭고함을 느껴본 적이 있기는 했던가.
첫 유럽 여행에서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을 방문했을 때, 신비로운 짐승의 혓바닥처럼 붉게 솟아오르던 일출을 보았을 때, 새벽 예불을 하던 스님들의 성스러운 만트라를 들었을 때... 그 찰나의 순간에 절대 경지의 느낌을 한 자락 맛본 것 같기도 하지만 나는 그때의 내 감흥을 오롯이 표현해내기 위해 '숭고하다'는 단어를 떠올리진 못했다. 기껏해야 내가 사용할 수 있었던 표현은 '대박이다, 죽인다' 같은 단어를 제외하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가 최선이었다.
숭고함이라고 하면 세속의 차원이 아닌 신과 교감하는 영성의 세계에서나 통용될 것 같은 단어였다. 아무래도 리처드 용재 오닐은 예술가이고 게다가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이니 범부인 나와는 다른 차원에 사는 사람인가 보다 생각했다. 사용할 수 있는 언어 표현의 다양성만큼 그 사람이 느끼는 세계의 층 또한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가 연주를 할 때마다 가닿는다는 숭고함의 세계는 과연 어떤 경지일까?
유튜브로 리처드 용재 오닐의 연주 동영상을 보았다. 무대 위에 존재하는 건 활을 켜는 그의 움직임과 행위에의 몰입, 그리고 마찰이 만들어내는 소리의 파동이 전부였다. 그것들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무언가'가 내 몸의 세포를 건드렸고, 세포 깊숙이 마음을 건드렸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은은한 미소를 보았다.
아마도 무대 위에서 리처드 용재 오닐은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끌어모아 음악을 연주했을 것이다. 그가 느낀 슬픔과 아름다움, 아련함과 경이로움... 혹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궁극의 감정들을... 오묘한 미소가 그가 느끼는 행복 너머의 어떤 고양된 감정을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연주 행위에 깊이 몰입한 그는 '내가 있다'는 생각 또한 잊은 채 오직 그 순간 흘러나오는 선율만을 느꼈을 것이다. 신에게 자신의 모든 행위를 내맡긴 영혼만이 느낄 수 있는 한없는 자유...
눈에 보이진 않지만 기체처럼 분명 존재하는 그 멜로디가 위로, 위로 한없이 올라가는 듯했다. 대기권을 넘어 우주의 지붕마저 통과한 멜로디가 가 닿을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곳이야말로 숭고함의 세계가 아닐까, 그저 땅 위에서 추측해볼 따름이다.
언젠가 어느 책에서 이런 문장을 본 적이 있다.
'오늘 당신은 당신의 사랑으로 무엇을 하겠습니까?'
내 안에 한 줌의 사랑이라도 존재한다면 그 사랑으로 오늘 무엇을 하겠냐는 질문이 그야말로 '숭고하게' 다가왔다. 클래식을 연주하는 예술가는 아니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숭고함에 가 닿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이 질문의 답을 찾고, 그 답을 행하는 것에 있지 않을까 생각됐다.
가수 아이유는 한 인터뷰에서 '하나의 노래로 기억된다면?'이라는 질문에 <마음>이라는 곡을 선택했는데, 그 이유는 이렇다.
"<마음>이라는 곡은 마음속 가장 좋은 부분만 뜰채로 떠서 만든 자작곡이에요."
아이유의 인터뷰를 듣고 내가 왜 <마음>을 즐겨 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 곡은 만든 이의 마음속에 있던 무수한 것들 가운데, '최고의 사랑'으로 만들어진 노래였다.
사랑으로 하는 말은 숭고한 말이다. 사랑으로 쓰는 글은 숭고한 글이며, 사랑으로 행하는 모든 행동들은 숭고한 행위가 될 것이다. 소중한 인생, 이왕이면 내 안의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뜰채로 건져 세상에 빛처럼 뿌리고 싶다.
아직은 건져 올릴 사랑의 무게가 1g도 채 안 될 것 같아 두렵지만, 어쩌면 바로 이런 생각이야말로 나를 숭고함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작은 나(ego)에 갇혀있는 좁은 생각 말이다. 지금 당장 신을 닮은 내 안의 사랑을 담아 화분에 물을 주어야겠다.
숭고함은 우주의 지붕 너머 신의 세계에 존재하는 언어이면서 동시에 일상의 작은 세계 한가운데도 존재한다. 틀림없이 그렇다.